1719년에서 1720년에 걸쳐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의 습직(襲職)을 축하하기 위해 이루어진 사행. 기해년신행(己亥年信行). 기해통신사(己亥通信使).
1719년(숙종 45) 도쿠가와 이에쓰구(德川家繼)에 이어 쇼군이 된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의 습직(襲職)을 축하하기 위해 이루어진 사행이다.
정사
홍치중(洪致中), 부사
황선(黃璿), 종사관
이명언(李明彦), 제술관
신유한(申維翰), 서기 강백(姜栢) ‧ 성몽량(成夢良) ‧ 장응두(張應斗), 역관 박재창(朴再昌) ‧ 한후원(韓後瑗) ‧ 김도남(金圖南), 사자관 정세영(鄭世榮) ‧ 김경석(金景錫), 화원 함세휘(咸世輝), 양의 권도(權道), 의원 백흥전(白興銓) ‧ 김광사(金光泗) 등이 파견되었으며, 1719년 4월 11일 한양을 떠났으며, 6월 20일 부산을 출발하여 이듬해 1월 7일에 돌아왔다.
이번 사행은 1711년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百石)의 건의에 의해 막부장군(幕府將軍)이 국왕(國王)의 호를 사용하게 된 것을 개정 이전 상태로 환원하는 등, 사행의 의례를 구례(舊禮)로 되돌리는 개혁이 이루어졌다. 한편, 제술관 신유한(申維翰)이 쓰시마도주의 연회에 초청되었으나, 도주가 앉아서 인사를 받는 것의 부당함 등 예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연회 참석을 거절하였고, 일본 측에서는 이것이 선례를 따른 것이라며 갈등을 빚은 일이 있었다. 이후 제술관과 도주와의 예법은 변경되었고, 사연(私宴)에 제술관이 참여하여 시를 짓는 것이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