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3 ~ 164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이다. 자는 계승이며, 호는 인재이다. 시호는 정간이다.
최현은 경학을 비롯하여 산수·군진·의약·풍수에 이르기까지 정통하고, 특히 예학에 뛰어났던
정구(1543~1620)를 스승으로 삼아 그 밑에서 학문을 익혔다.
1588년(선조 21) 생원 과 진사를 시험하여 뽑는 과거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웠으며, 나라에 구국책(救國策)을 올렸다. 이 때의 공으로 1598년 최현은 원릉 참봉이 되었다.
1606년에는 조선 시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 보던 과거인 증광시 생원과에 장원 급제하여, 정9품 벼슬인 검열이 되었다. 1608년에는 임금의 명령을 받아 문서를 꾸미는 정8품 벼슬인 예문관 대교가 되었다. 같은 해 사신을 따라가던 임시 벼슬인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갔는데, 그 곳에서 명나라 황제에게 《은자대학연의소대전》을 받았다.
1612년(광해군 4)에는 실록청에서 선조 재위 41년(1567~1608) 동안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기록한 《선조실록》을 편찬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또한, 광해군 때 천도론이 거론되자 이를 적극 반대하여 그 계획을 중단시켰다.
1623년(광해군 15)
김류·
이서 등 서인 일파가 인륜에 어긋나는 행동을 많이 하고 정치를 문란하게 한 광해군과 당시의 집권파인 대북파를 몰아 내고 능양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로써 능양군은 인조가 되었는데, 이 사건을
인조 반정이라고 한다.
최현 은 인조 반정 후 정6품 벼슬인 홍문관 수찬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1624년 예부종사관· 부제학을 거쳐 강원도 관찰사 가 되었다. 1627년(인조 5)에는 이인거가 모반을 일으켰는데, 이 때 최현이 여기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투옥되었다. 그러나 왕의 특명으로 곧 석방되었다.
최현은 죽은 뒤 예조 판서로 품계가 높여졌으며, 선산에 있는
송산서원 에 제향되었다.
그가 남긴 문집으로는 《인재집》 《일선지》 등이 있는데, 《일선지》는 선산 지방의 역사·지리· 풍속 등을 기록한 책이다.
가사로는 임진왜란 때 「
명월음(明月吟)」 「
용사음(龍蛇吟)」을 지어 애국심을 표현하였으며, 1591년 『금생이문록(琴生異聞錄)』이라는 글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