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첩) 조선 말기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우리 나라의 지도.
만든 형식과 내용
1861년(철종 2년)에 김정호 자신이 판목에 새겨 초판을 펴내었고, 1864년(고종 원년)에 다시 펴내었다.
김정호는 이보다 앞서
1834년에
청구도(靑邱圖)를 만들었는데, 대동여지도는 그 내용을 더 보충하여 만든 것이다. 특히 누구나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전도를 22첩으로 나누어 각 첩을 책처럼 접을 수 있게 만들었다.
사용할 때는 2개 또는 3개씩 펴 놓고 볼 수도 있고, 모두 다 펴 놓고 전도 를 한눈에 볼 수도 있다.
각 첩은 가로 8, 세로 12로 나눈 모눈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모눈 하나가 사방 10리가 되게 하였으므로, 각 첩은 가로가 80리(32km)로 결국 축척 16만분의 1지도가 되는 셈이다.
지도의 내용은 산천(山川), 해도(海島), 영아(營衙), 읍치(邑治), 성지(城池), 진보(鎭堡), 역참(驛站), 창고(倉庫), 목소(牧所), 봉수(烽燧), 능침(陵寢), 방리(坊里), 고현(古懸), 고산성(古山城), 도로 등이 표시되어 있다.
또 청구도와 같은 설명은 거의 없지만 도로망, 산천의 본지(本支)가 더욱 세밀하게 나타나 있고, 산맥의 표시 방법도 많이 진보된 상태였다.
문화재로서의 가치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청구도를 만든 다음, 다시 27년 동안 전국을 몸소 걸어다니면서 실제로 측량하여 만든 지도로서 그 정확함이 오늘날의 지도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이다.
서양의 지도학이 들어오기 전에 한 개인의 생애를 건 집념으로 이룩해 놓은 이 대동여지도야말로 참으로 소중한 문화재 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정호가 이 판각본을 대원군에게 바치자, 나라의 기밀을 새어 나가게 한다는 죄명을 씌워 그를 감옥에 가두고 각판은 불태워 버렸다.
그 뒤 김정호는 옥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만, 그의 업적은 길이 남아 전한다.
이 지도는 일제 때 총독부에서 지형도를 만들기까지는 가장 정확한 한반도의 지도였다.
1936년에 경성 제국 대학에서 축쇄판과 지도에 실린 지명 색인을 펴내었고, 그 뒤 여러 가지 영인본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