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38]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의 장수. 공손씨(公孫氏)의 내분에서 지배자의 지위를 차지하여, 228년에 제4대 공손씨(재임 : 228~238)가 되었다.
요동 공손씨 정권의 4대 왕. 2대 왕인
공손강의 아들. 아버지가 사망했을 당시에는 나이가 어려서 그 지위를 계승하지 못했으나, 장성한 후인 238년에 병약한 숙부인
공손공을 겁박하여 위나라에 인질로 보내졌던 형
공손황을 재치고 그 지위를 빼앗았다. 이 일로 인하여
위나라 조정과 불화하게 되자
오나라와의 외교관계 개선을 도모하였다.
229년에는 오나라에서 장강(張剛)과 관독(管篤) 등을 사절로 삼아 요동으로 파견하였으며, 230년에는 요동이 오나라와 이어지는 것을 염려한 위나라가 요동에 사절을 보내서 공손연에게 거기장군의 관작을 내려 회유하려 하였으나 이후로도 공손연은 오나라와 사절을 주고 받으며 우호관계를 지속하였다.
232년에는 오나라에서 주하(周賀)와 배잠(裵潛) 등을 사절로 파견해왔으며 공손연 또한 숙서(宿舒)와 손종(孫綜) 등을 오나라에 사절로 파견하였다. 이 때 즈음에 손권이 공손연을 사지절ㆍ독유주ㆍ영청주목ㆍ요동태수ㆍ연왕으로 봉하였다.
이듬해 233년에 오나라가 장미(張彌)ㆍ허안(許晏)ㆍ하달(賀達) 등을 사절로 보냈으나, 오나라가 위나라를 상대하기에 역부족이라 판단한 공손연은 오나라를 배반하고 이들의 목을 베어 위나라로 보냈다. 위 명제는 그에 따라 공손연을 대사마ㆍ낙랑공에 봉하였으며, 한편 이에 분노한 손권은 요동을 치고자 하였으나 신료들이 만류한 탓에 이를 실행하지는 않았다.
237년에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이 공격해오자 공손연이 요수현으로 군사를 보내 이를 방어하였다. 그 때에 마침 열흘 간 비가 내려 이를 방어해냈다. 이후 위나라의 침공에 대비하여 선비족이나 오나라 등과 우호를 다지고 위나라 등에도 글을 보냈으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이후 공손연은 연왕을 자칭하고 스스로 백관을 설치하며 "소한(紹漢)" 연호를 사용하였다.
238년 6월에 위나라에서 사마의를 보내서 요동을 공격해오자 공손연은 이번에도 요수현으로 병력을 보내 이를 방어하도록 하였으나, 사마의가 일부 병력으로 요수현에 주둔한 공손연의 병력의 한 눈을 팔게 하고는 자신은 본대를 빼내서 요동왕국의 도읍인 양평현을 포위하였다. 이후 30일간 비가 쏟아지자 양평성은 고립되었으나 사마의는 범람한 요수의 물길을 통해 원할한 보급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8월 23일에 이르러 공손연의 군대가 무너지고 양평성이 함락되자, 공손연은 아들인
공손수와 함께 수백기의 기병을 거느리고 포위망을 뚫고는 동남쪽으로 도주하려 했으나 결국
사마의에게 주살당하였다. 이렇게 하여 공손씨 정권의 관할하에 있던
요동군ㆍ
낙랑군ㆍ
대방군ㆍ
현도군 등이
위나라에게 평정되었으며, 50여년간 이어졌던 공손씨 정권은 멸망하였다.
【출처】 요동 공손씨 정권(요동왕국)의 가계도|작성자 원한의 거리
- 공손씨(公孫氏) : 중국 후한 말부터 삼국 시대에 걸쳐 랴오둥에서 지방 정권을 잡고 세력을 떨친 집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