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四月一日。朝衙得公驗。尚書賜給布三端㭟陸斤。齋時當寺有齋。今日尚書郎君生日。因設長命齋。
7
4월 1일, 아침 집무 시간에 공험註 779을 받았다. 상서가 베 3단(端)註 780과 차 6근을 내려 주었다. 재를 들 시간에 이 절에서 재를 베풀었다. 오늘은 상서 아드님註 781의 생일이었으므로 장명재(長命齋)註 782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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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779 공험(公驗)은 관청에서 발급하는 것으로 공적인 증명서를 말한다. 공빙(公憑)이라고도 부른다. 빙(憑)은 증거를 뜻하고, 험(驗)은 증명하는 수단을 의미한다. 공험은 넓게는 공적 증명서의 총칭이며, 여행에 있어서 관청의 증명을 필요로 한 점에서 좁게는 오로지 여행(교통)증명서를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28쪽).
9
註) 780 5장(丈)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65쪽).
10
《통전》 권6 식화6 부세 하에 의하면 단의 길이는 5장과 4장 8척의 두 종류가 있다. 그리고 초당(初唐)과 성당(盛唐) 때의 길이는 다르다. 대척 30.3cm를 기준으로 하면 다음과 같다. 단=5장=50척=15.15m(大尺)(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72쪽).
11
註) 781 원문은 郎君인데, 귀인이나 높은 관리의 아들에 대한 경칭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34~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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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782 장명재(長命齋)는 생일에 무병장수를 기원해서 삼보를 공양하는 재회이다. 당에서는 현종 시대 이래 천자의 생일에 재회를 행하였는데,(개성 5년 6월 11일조, 회창 4년 3월조) 유력자들도 이와 같은 재회를 행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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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日早朝蕭判官宅喫粥。便入州奉狀謝尚書施物。兼辭尚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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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國求法僧圓仁。伏蒙 尚書仁造。賜給布參端茶陸斤。下情不勝感戴。謹奉狀陳謝。不宣謹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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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이른 아침에 소판관 집에서 죽을 먹었다. 곧 주에 들어가 상서가 물품을 보시해준 것에 감사하는 글을 올렸다. 아울러 상서께 작별인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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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구법승 원인은 엎드려 상서의 어진 덕을 입어 베 3단註 783과 차 6근을 받았습니다. 저는 감사한 마음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글을 올려 감사함을 전합니다. 이만 줄이고 삼가 서장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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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783 포(布)는 마직물이다. 1단의 기준에 대해 《당령(唐令)》에 의하면 건(巾)이 1척 8촌인데, 그 길이는 5척과 4척 8촌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원인이 받은 1단은 실제 어느 정도의 길이인지 알 수 없지만, 포는 화폐적인 가치를 지녀 유통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37~3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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尚書喚入衙前傳語。所施輕少。不足言。謝勞和上來好去。次入節度副使張員外院辭別。員外喚入衙裏。給茶餅食。啜茶辭別。員外到寺裏。赴趙德濟請齋。暮際。幕府判官施給粮米二斗。驢料小豆二斗。黃昏。入幕府判官宅。謝施路粮辭別判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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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가 불러 관아에 들어갔다. 전하여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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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한 물건이 미미하고 적어, 감사하다는 말을 듣기에는 부족합니다. 스님을 오시라 해서 수고를 끼쳤습니다. 잘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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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784라 하였다. 다음에 절도부사 장원외 아문에 들어가 작별인사를 했다. 원외가 아문 안으로 불러 차와 떡을 주며 먹게 하였다. 차를 마시고 원외와 작별인사를 했다. 절에 도착해 조덕제(趙德濟)의 초청을 받고 재를 들었다. 해질 무렵에 막부 판관註 785이 쌀 2말과 나귀 사료註 786로 소두(小豆) 2말을 보시했다. 황혼 무렵에 막부 판관의 집에 들어가 여정에 쓸 양식을 보시해준 것에 감사하고 판관과 작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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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784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자주 사용되는 “別離”의 구어이다. 기분이 좋다는 것을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39~3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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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785 여기에서 막부(幕府) 판관(判官)은 소경중(蕭慶中)을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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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786 3월 6일조에도 왕장종(王長宗)이 나귀 1마리를 보시했다고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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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日平明發。幕府判官差行官一人。送過城門。幕府從初相見之時。心極慇懃。在寺之時。每日有恩施。慰([□@考]慰東本作慇)問不絕。發行之時。差人送路。兼示道路。今日尚書監軍。諸神廟乞雨。從寺裏。過州城西北。去城十里有堯山。山上有堯王廟。堯王昔遊此界行過之處。遂建其廟矣。相傳云。每乞雨時。了([□@考]了池本作多)感降雨。出城向北行廿里。到益都縣界石羊村陳家飡。主人心平。齋後西北行十五里。到臨淄縣界淄水驛。西行廿五里。到金嶺驛東王家宿。主人心性直好。見客慇懃。望西遙見長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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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날이 밝을 무렵에 출발했다. 막부註 787판관註 788이 행관註 789 한 사람을 보내 성문을 지나는 데까지 전송해주었다. 막부 판관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씨가 매우 친절하여, 절에 있을 때 매일 은혜를 베풀어 주고 위문도 끊이지 않았다. 떠날 때는 사람을 보내 전송해주고 길을 가르쳐 주었다. 오늘 상서와 감군(監軍)註 790이 여러 신묘(神廟)에 비 오기를 빌었다. 절에서부터 청주성을 지나 서북쪽으로 성에서 10리를 가면 요산(堯山)註 791 註 792이 있고, 산 위에 요왕묘(堯王廟)가 있다. 요왕이 옛날 이 땅을 유람했는데, 지나간 곳에 마침내 그 사당을 세웠다. 전하는 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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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비 내리기를 빌 때 마다 대부분 감응해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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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한다. 성을 나와 북쪽으로 20리를 가서 익도현(益都縣) 땅의 석양촌(石羊村)註 793에 이르러 진씨(陳氏) 집에서 식사를 했다. 주인은 마음이 평온했다. 재를 마친 후 서북쪽으로 15리를 가서 임치현(臨淄縣) 땅 치수역(淄水驛)註 794에 도착했다. 또 서쪽으로 25리를 가서 금령역(金嶺驛)註 795 동쪽에 이르러 왕씨 집에서 묵었다. 주인은 심성이 곧고 고와서 객을 보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서쪽을 바라보니 멀리 장백산(長白山)註 796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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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787 군대의 출정에는 군부에 장막을 사용했던 점에서 장군을 막부(幕府)라고 불렀다. 한나라 때 이후 막부를 설치해 문관을 임용하였다. 절도사도 군정관이었던 점으로부터 그를 막부라고 불렀는데, 이후 막부는 막료의 대명사가 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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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788 여기에서 막부(幕府) 판관(判官)은 소경중(蕭慶中)을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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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789 행관(行官)은 아관(牙官)에 대응되는 말인데, 절도사의 시찰이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각지에 파견되는 하급 관리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69쪽, 3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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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790 감군(監軍)은 군사를 감찰하는 관직이다. 한 무제 때 감군사자(監軍使者)가 설치되었고, 위진시대에 그것을 감군사(監軍事) 혹은 감군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감군은 당 현종 개원 20년(732) 이후 환관에 의해 임명된 감군사의 약칭이다. 그들은 군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해 절도부에 상주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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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791 《大淸一統志》 권134에서는 《水經注》를 인용하여, 요 임금이 巡狩次 이 산에 올랐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요산이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산은 익도현 서북쪽 8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였다. 중국에는 요 임금 전설과 관련하여 요산이라 이름한 곳이 여러 곳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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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792 요산(堯山)은 익도현 서복쭉 10리에 있으며 높이는 303m이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권134에 의하면 《수경주(水經注)》를 인용하여, 요 임금이 순수 차 이 산에 올랐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요산이라 했다고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42~3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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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793 익도현에서 서북쪽으로 약 25리, 교제철도 치하점의 동남쪽 3리에 석양(石羊)이라는 마을이 현존하고 있다. 옛날 촌의 범위는 넓었기 때문에 《입당구법순례행기》의 석양촌은 그곳에서 동남쪽으로 위치한다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43~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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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794 치수(淄水)는 치천(淄川), 치하(淄河)라고도 한다. 그 근원은 치천현의 원산에서 출발해 박산·임치·광요현을 경유해 치수박에 들어간 후 바다로 들어간다. 치수역(淄水驛)은 현재 존재하지 않지만, 치천이 마침 치하점과 신점 중간을 흐르는데, 치하점에서 서쪽으로 가서, 치천을 넘어 그 부근에 안락점(安樂店)이 있다. 치수역은 이 곳으로 비정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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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795 금령역(金嶺驛)은 현재 금령진(金嶺鎭)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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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796 장백산(長白山)은 금령진(金嶺鎭)에서 서쪽으로 약 60km 지점에 솟아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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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日平明發。西行十六里。入小路望長白山。去([□@考]去池本無)向西行五里。到淄州淄川縣界張趙村。入趙家飡。主人極貧。無飯可喫。心裏無惡。齋後向西北行卅里。到長山縣界古縣村𮠔([□@考]𮠔不明或廓字歟)家宿。主人鍛工。本是沛州人。心平有道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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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4일, 날이 밝을 무렵에 출발하여 서남쪽으로 16리를 가서 작은 길로 접어들어 멀리 장백산을 바라보며 갔다. 서쪽으로 5리를 가서 치주(淄州) 치천현(淄川縣)註 797 註 798 땅의 장조촌(張趙村)註 799에 도착해 조씨 집에 들어가 식사를 했다. 주인은 몹시 가난하여 먹을 만한 음식이 없었으나 마음씨는 나쁘지 않았다. 재를 마친 후 서북쪽으로 30리를 가서 장산현(長山縣)註 800 땅의 고현촌(古縣村)註 801에 이르러 곽씨 집에서 숙박했다. 주인은 대장장이로 본래 패주(沛州)註 802 사람이다. 마음씨는 평온하고 불심이 있었다.
52
註) 797 치주는 수 개황 16년(596)에 처음 설치되어, 당 초기에는 치천현, 長白縣, 萊蕪縣 등 3현을 관할하다가 후에는 長山縣과 高苑縣까지 관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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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798 치주(淄州)는 수 개황 16년(596)에 처음 세워졌는데, 당 초기에는 치천현, 장백현(長白縣), 내무현(萊蕪縣)을 관할하였다. 후에 장산현(長山縣), 고원현(高苑縣), 포태현(蒲台縣)도 관하에 들어갔는데, 경용 원년(705)에 이르러 포태현이 폐지되면서 도합 5현이 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45쪽).
54
註) 799 장조촌(張趙村)은 현재 치박시 관내에 있다. 주종 일행은 금령진(金嶺鎭)에서 후부(堠阜), 관장(管莊) 부근을 지난 후 장조촌에 이르렀다고 생각된다. 장조촌은 치천현 장점(張店), 현재 치박시 동남 78리에 그 이름이 보이는데, 거리도 거의 합치하고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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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800 장산현(長山縣)은 현재 치박시 관하에 들어가 있는데, 수 개황 18년(598) 무강현(武强縣)을 개명한 후, 민국시대에 이를때까지 현치는 바뀌지 않았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45~3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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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801 고현촌(古縣村)은 장산현에서 동남쪽 10리에 있는 고현점(固縣店)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장조(張趙)에서 서북쪽 약 30리에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46쪽).
57
註) 802 한나라 때 패군(沛郡, 안휘성 숙현), 북위의 패군(산동성 조현), 유송에서 진나라 까지의 패군(안휘성 천장현)과 같은 이름은 있지만 주(州)이름으로써 패주(沛州)는 보이지 않는다. 라이샤워는 여기서의 패주를 패현의 오기로 보았다. 패(沛)는 패(貝)와 음이 비슷하므로 여기서의 패주(沛州)는 패주(貝州)의 오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개성 5년 4월 12일조에도 패주(貝州)가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46쪽).
60
五日早發。西北行十里。到長山縣。從縣西行十里。到張李斷中。主人慇懃。齋後西行十五里。到長白山東面。日欲申時。於仙人臺前不([□@考]不或石字誤歟)村史家喫茶。問醴泉寺。主人答。從不村望西直行十五里。到醴泉寺(云々)。便向正西入山去。錯差路行十餘里。多有差路。不知所向。緣夜却不村史家宿。竟夜狗吠。恐懼不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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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5일, 일찍 출발하여 서북쪽으로 10리를 가서 장산현(長山縣)註 803에 도착하였다. 현으로부터 서쪽으로 10리를 가서 장리(張李)註 804에 이르러 단중註 805했다. 주인은 친절하였다. 재를 마친 후 서쪽으로 15리를 가서 장백산 註 806 동쪽에 이르렀다. 시각이 오후 4시경이 될 무렵 선인대(仙人臺)註 807 앞의 불촌(不村)註 808 사씨(史氏) 집에서 차를 마셨다. 예천사(醴泉寺)註 809를 물으니 주인이 답하기를
62
“불촌에서 서쪽을 바라보며 똑바로 15리를 가면 예천사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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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운하였다. 곧 정서쪽을 향해 산길로 들어갔다. 갈림길註 810에서 길을 잘못 들어 10여 리를 가니, 여러 갈래로 길이 있어 어느 길로 가야할지 몰랐다. 밤이 되었으므로 불촌 사씨 집으로 되돌아가 묵었다. 밤새도록 개가 짖어 무서워 잠을 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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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803 장산현(長山縣)은 현재 치박시 관하에 들어가 있는데, 수 개황 18년(598) 무강현(武强縣)을 개명한 후, 민국시대에 이를때까지 현치는 바뀌지 않았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45~346쪽).
65
註) 804 장산현 서쪽 10리에 예참점(禮參店)이 있다. 리(里)의 수로 추측해 보면 이 땅의 부근에서 찾아야 한다. 원문은 장리(張李)인데, 이는 장리촌(張李村)에서 “촌(村)”이 탈락된 것으로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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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805 단중(斷中)에서 中은 낮 12시이다. 단중은 낮 12시경을 의미하는 구어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본 기록을 처음으로 하여 이후 약 70회나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계율에서는 낮 12시를 넘겨서 식사를 하는 것을 비시(非時) 또는 비시식(非時食)라고 하여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단중은 낮 12시 이후에는 식사를 단절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적산에서 체류 중일 때 원인은 그 구어적 불여를 학습했다고 생각되고, 가끔씩 사용하였다. 체류 중 음(陰, 49기일)의 별칭으로 단칠(斷七)·종칠(終七)·진칠(盡七) 등을 사용하는데, 종중(終中)·진중(盡中)와 같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단칠과 단중은 같은 어법이다. 게다가 斷은 從·盡과 뜻이 거의 비슷하다. 또 돈황변문(敦煌變文)의 《大目乾連冥間救母變》에 “단오(短午)”가 보이는데, 단중과 치환 가능하다. 단중은 중국의 사료에 남겨져 있지 않은 구어이다(小野勝年, 「斷中の語義について」, 《東洋史硏究》17-4)(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5~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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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806 장산현, 추평현, 장구현, 치천현 등에 걸친 산으로 장백산(675m), 회선산(500m), 마화산(800m) 등이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48쪽).
68
註) 807 선인대(仙人臺)는 회선산(회선봉)을 가리키는 것 같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48쪽).
69
註) 808 불촌(不村)은 단장(段莊) 혹은 최가영(崔家營) 부근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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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809 예천(醴泉)은 감미로운 샘물로, 예부터 이곳에 얽힌 전설은 각지에 있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권127에 의하면 예천사(醴泉寺)는 추평현(鄒平縣) 서남쪽 30리 지점에 있다고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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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810 라이샤워는 이것을 wrong road 혹은 different road로 변역하는데, 갈림길이 옳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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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日早朝。主人施粥。又差一人相送。指路。正西。入谷行過高嶺。向西下坂方得到醴泉寺。菓薗喫茶。向南更行二里。到醴泉寺斷中。齋後巡禮寺院。禮拜誌公和上影。在瑠璃殿內安置。戶柱楷砌。皆用碧石構作。寶幡奇彩。盡世珍奇。鋪列殿裏。誌公和上。是十一面[A24]菩薩之化身。其本緣鐫著碑上。和上。朱代金城人也。降靈於此長白山。滅度。其後肉身不知所向。但作影像。舉國敬重。堂西谷邊。有醴泉井。向前泉涌。香氣甘味。有喫之者。除病增壽。爾來名為醴泉寺。和上滅後。泉水涸盡。但空井。如今泉井之上。建一小堂。更作和上影。影前堂內。有石井。深五尺餘。今見無水也。寺之南峯。名為龍臺。獨出羣岫。地圖所載。曾有龍舞其巔以此奏聞。奉勑。改名龍臺寺。後因泉涌。改名醴泉寺。東西南方。嵩峯連塞。北方開豁。無山阜矣。寺舍破落。不多淨喫。聖跡陵夷。無人修治。寺庄園十五所。于今不少。僧途本有百來僧。如今隨緣散去。現住寺者。三十向([□@考]向池本作巳)上也。典座僧。引向新羅院安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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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6일, 이른 아침에 주인이 죽을 보시했다. 또 한 사람을 파견해 길을 인도하며 바래다주었다. 정서쪽 골짜기로 들어가 높은 고개를 넘고 서쪽으로 비탈길을 내려가 비로소 예천사註 811 과수원註 812에 도착해 차를 마셨다. 남쪽으로 다시 2리를 가서 예천사註 813에 도착해 단중註 814했다. 재를 마친 후에 절은 순례하고 지공화상(誌空和尙)註 815 註 816의 존상에 예배했다. 존영은 유리전 안에 안치되어 있었다. 집의 기둥과 계단 섬돌은 모두 푸른빛이 나는 돌註 817로 만들었다. 보개(寶幡)의 기이한 색채는 세상의 온갖 진기한 것을 다하여서 전당 안에 줄지어 널려 있었다. 지공화상은 곧 십일면보살(十一面菩薩)註 818의 화신이다. 그 본래의 인연이 비석註 819 註 820에 새겨져 있다. 화상은 주씨(朱氏)註 821로 금성(金城)註 822 註 823 사람인데, 이 장백산에 강령(降靈)하여 입적하였다. 그후 육신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의 영당(影像)을 만들어 온 나라 사람들이 존경하고 있다. 전당(殿堂)의 서쪽 골짜기 언저리에 예천정(醴泉井)이 있다. 예전에는 샘물이 솟아나 향기롭고 감미로워, 이를 마시면 병이 낫고 수명이 길어졌다. 그 이래로 이름을 예천사라 하였다. 화상이 세상을 떠난 뒤 샘물은 다 말라버리고 다만 빈 우물이 되었다. 지금은 우물 위에 조그만 당(堂)을 짓고 다시 화상의 존영을 만들어 놓았다. 당 안의 존영 앞에는 돌로 된 우물이 있는데, 깊이가 5척 정도 된다. 지금 보니 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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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의 남쪽 봉우리는 이름을 용대(龍臺)라 한다. 많은 봉우리에서 홀로 우뚝 솟아있어 지도에도 실려 있다. 일찍이 용이 그 봉우리에서 춤을 추었으므로, 이 일을 천자에게 상주하여 조칙을 받들어 이름을 용대사(龍臺寺)로 바꾸었다. 후에 샘물이 솟아났으므로 예천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동쪽, 서쪽, 남쪽은 높은 봉우리들이 연이어져 막혀있고 북쪽은 넓게 트여 산이나 언덕이 없다. 절 건물은 부셔지고 허물어져 대부분이 청결註 824하지 못하다.註 825 성스러운 유적이 쇠락했으나 수리하여 돌보는 사람이 없다. 절의 장원은 15곳이었는데, 지금도 적지 않다. 승려들註 826도 본래는 100여 명이었으나 지금은 인연 따라 흩어져가고 현재 절에 거주하는 사람은 30명 정도이다. 전좌승註 827은 우리를 인도해 신라원註 828에 안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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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811 예천(醴泉)은 감미로운 샘물로, 예부터 이곳에 얽힌 전설은 각지에 있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권127에 의하면 예천사(醴泉寺)는 추평현(鄒平縣) 서남쪽 30리 지점에 있다고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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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812 이곳은 진장(陳莊) 부근이라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51쪽).
79
註) 813 예천(醴泉)은 감미로운 샘물로, 예부터 이곳에 얽힌 전설은 각지에 있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권127에 의하면 예천사(醴泉寺)는 추평현(鄒平縣) 서남쪽 30리 지점에 있다고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51쪽).
80
註) 814 단중(斷中)에서 中은 낮 12시이다. 단중은 낮 12시경을 의미하는 구어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본 기록을 처음으로 하여 이후 약 70회나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계율에서는 낮 12시를 넘겨서 식사를 하는 것을 비시(非時) 또는 비시식(非時食)라고 하여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단중은 낮 12시 이후에는 식사를 단절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적산에서 체류 중일 때 원인은 그 구어적 불여를 학습했다고 생각되고, 가끔씩 사용하였다. 체류 중 음(陰, 49기일)의 별칭으로 단칠(斷七)·종칠(終七)·진칠(盡七) 등을 사용하는데, 종중(終中)·진중(盡中)와 같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단칠과 단중은 같은 어법이다. 게다가 斷은 從·盡과 뜻이 거의 비슷하다. 또 돈황변문(敦煌變文)의 《大目乾連冥間救母變》에 “단오(短午)”가 보이는데, 단중과 치환 가능하다. 단중은 중국의 사료에 남겨져 있지 않은 구어이다(小野勝年, 「斷中の語義について」, 《東洋史硏究》17-4)(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5~216쪽).
81
註) 815 寶誌和尙으로 육조시대의 기행승이다. 속성은 朱氏이고 金城 사람이다. 僧儉에게 사사하여 禪業을 닦다가 각지를 유랑하며 민중 구제에 힘쓰다가 천람 13년(514)에 97세의 나이로 죽었다. 후세에 민간에서 그의 신앙이 유행하여 그를 십일면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추앙하였다.
82
註) 816 지공화상(誌空和尙)은 보지화상(寶誌和尙, 425~514)인데, 보지화상(保誌和尙)이라 하기도 한다. 육조시대의 기행승으로 알려져 있는데, 후세에 이르러 민간에 널리 신앙되었다. 속성은 송(宋)씨이고, 금성(金城) 출신이라고 전한다. 금성은 지금의 남경 지방을 가리키는 것 같다. 도림사(道林寺)에서 출가하여 승검(僧儉)에게서 사사하여 선업을 닦았다. 이후 천람 13년(514)에 97세로 입적하셨는데, 남경 교외에 있는 종산(鍾山)의 독룡부(獨龍阜)에 장사지내고, 묘는 개선사(開善寺)에 세웠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51~353쪽).
83
註) 817 푸른빛이 나는 사암(砂岩)으로, 북경의 궁전에도 대리암과 함께 이 종류의 돌을 사용하고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53쪽).
84
註) 818 십일면관세음보살을 가리킨다. 아수라도(阿修羅道)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로서 머리 위에 열한 개의 얼굴이 있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67쪽).
85
註) 819 大唐齊州章邱縣常白山醴泉寺誌公文碑를 지칭한다. 이 비석은 예천사지에 현존하고 있다.
86
註) 820 이 비석은 사원 안에 현존하고 있는데, 문자는 금석 관계의 모든 책에 저록되어져 있다(楊殿珣, 《석각제발색인(石刻題跋索引)》). 비의 이름은 대당제주장구현상백산예천사지공문비(大唐齊州章邱縣常白山醴泉寺誌公文碑)이다. 비문은 이미 마멸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53~355쪽).
87
註) 821 원문에는 ‘朱代’라고 되어 있으나 ‘朱氏’의 오기로 보인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67쪽).
88
註) 822 중국에 금성이라는 지명이 여러 곳 있기 때문에 어느 금성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 라이샤워는 섬서성의 금성이라 하고((E. O. Reischauer, 《Enin's Diary》, New York:The Ronald Press Co., 1955, 102쪽), 小野勝年은 지금의 南京에 비정하였다.
89
註) 823 금성(金城)이라는 지명은 모든 곳에 있다. 감숙의 금성현이 있고, 섬서성에도 금성이 있다. 라이샤워는 주씨가 태어난 곳을 섬서성의 금성으로 보고, 섬서의 남정(南鄭) 지방에 해당한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삼국 오나라 때 지금의 남경(南京)을 가리켜 금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보지화상(寶誌和尙)의 활동 시기와 활동 구역을 통해 추측해보면 금성은 남경 지방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55쪽).
90
註) 824 원문은 淨潔인데 초본(抄本)에서는 淨喫이라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55~356쪽).
91
註) 825 본문에는 정결(淨潔)이 정끽(淨喫)으로 오기되어 있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68쪽).
92
註) 826 원문은 僧途인데, 도(途)는 도(道)와 음이 통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56쪽).
93
註) 827 9사(事)는 상좌(牀座), 강회(講會), 방사(房舍), 의물(衣物), 화향(花香), 과라(果蓏), 난수(煖水), 잡병식(雜餠食), 감사인(堪事人)이다(《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권6) 이러한 일들을 맡은 것이 전좌(典座)이다. 상좌를 전지(典知)한다는 뜻에 근거하는데, 선종에서는 특히 그 역할을 중시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81쪽).
94
註) 828 신라의 승려가 머무른 승방(僧坊)이다. 원인은 전에 청주 용흥사의 신라원에 머물렀는데, 그 원 또한 반도 출신의 승려가 사는 곳이라고 생각된다. 신라승들은 장안이나 오대산에로의 왕복에 이용했는데, 산동에 신라승이 많았다는 사실을 반영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56쪽).
97
七日早朝。堂頭喫粥便發。典座等眾僧留。明日當寺大齋。因何早去(云々)。緣欲早到臺山不住。出寺門。向北行十五里。到醴泉寺庄斷中。向正西行二十里。到章丘縣。從縣西行十五里。過濟河渡口。時人喚為濟口。從口西北行半里。王家宿。主人心平。
98
[4월] 7일, 이른 아침에 식당註 829에서 죽을 먹고 곧 출발했다. 전좌註 830 등 여러 승려들이 붙잡으며
99
“내일註 831이 절에서 큰 공양법회註 832가 열립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급하게 가십니까?”
100
운운하였다. 그러나 오대산에 일찍 도착하고자 더 머무르지 않았다. 절 문을 나와 북쪽을 향해 15리를 가서 예천사註 833 장원註 834에 도착해 단중註 835했다. 다시 정서쪽으로 20리를 가서 장구현(章丘縣)註 836에 이르렀다. 현에서 서쪽으로 15리를 가서 육하(淯河) 나룻터註 837를 지났다. 당시 사람들은 이곳을 육구(淯口)라 불렀다. 육구에서 서북쪽으로 반리를 가서 왕씨 집에서 숙박했다. 주인은 마음씨가 평온했다.
101
註) 829 원문은 堂頭인데, 頭는 접미어이다. 여기에서는 식당을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57쪽).
102
註) 830 9사(事)는 상좌(牀座), 강회(講會), 방사(房舍), 의물(衣物), 화향(花香), 과라(果蓏), 난수(煖水), 잡병식(雜餠食), 감사인(堪事人)이다(《마하승기율(摩訶僧祈律)》 권6) 이러한 일들을 맡은 것이 전좌(典座)이다. 상좌를 전지(典知)한다는 뜻에 근거하는데, 선종에서는 특히 그 역할을 중시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81쪽).
103
註) 831 4월 8일에 해당한다. 이 날은 석가모니가 태어난 날로, 권불회(불생회, 강탄회)를 하는 날이다. 예천사도 이 날의 재회를 준비하고 있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57~358쪽).
104
註) 832 여기서 말하는 ‘내일’은 석가모니가 태어난 4월 초파일이다. 이 날에는 전국적으로 큰 불사를 여는데, 예천사에서도 그러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5
註) 833 예천(醴泉)은 감미로운 샘물로, 예부터 이곳에 얽힌 전설은 각지에 있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권127에 의하면 예천사(醴泉寺)는 추평현(鄒平縣) 서남쪽 30리 지점에 있다고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51쪽).
106
註) 834 예천사에서 북서쪽 약15리, 대로에 장구현(章丘縣) 청양점(靑楊店)이 있다. 이곳에서 구 장구현까지 서쪽 약 20이기 때문에 예천사의 장원은 이 부근으로 비정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58쪽).
107
註) 835 단중(斷中)에서 中은 낮 12시이다. 단중은 낮 12시경을 의미하는 구어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본 기록을 처음으로 하여 이후 약 70회나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계율에서는 낮 12시를 넘겨서 식사를 하는 것을 비시(非時) 또는 비시식(非時食)라고 하여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단중은 낮 12시 이후에는 식사를 단절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적산에서 체류 중일 때 원인은 그 구어적 불여를 학습했다고 생각되고, 가끔씩 사용하였다. 체류 중 음(陰, 49기일)의 별칭으로 단칠(斷七)·종칠(終七)·진칠(盡七) 등을 사용하는데, 종중(終中)·진중(盡中)와 같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단칠과 단중은 같은 어법이다. 게다가 斷은 從·盡과 뜻이 거의 비슷하다. 또 돈황변문(敦煌變文)의 《大目乾連冥間救母變》에 “단오(短午)”가 보이는데, 단중과 치환 가능하다. 단중은 중국의 사료에 남겨져 있지 않은 구어이다(小野勝年, 「斷中の語義について」, 《東洋史硏究》17-4)(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5~216쪽).
108
註) 836 장구현(章丘縣)은 수 개황 8년(598), 현치(縣治) 동남쪽에 있는 장구(章邱)를 근거로 이름붙였다. 이전에는 고당(高唐)이라 하였는데, 북제 천보 7년(556)에 처음 현이 설치되었다. 당 정관 원년(627) 이후 제주(濟州) 소속이었다. 장구현은 청주(익도)와 제주(제남)을 연결하는 대로에 위치하고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58~359쪽).
109
註) 837 제하(濟河)는 산동의 큰 하천으로써 유명하다. 그런데 하도(河道)의 변천이 있어 옛날의 하천을 찾는 것은 곤란하다. 당나라 때 제하는 오늘날의 소청하(小淸河)에 해당한다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59쪽).
112
八日早發。正西行廿五里。到臨濟縣入尹家斷中。便發。有商人施五升米。過市正西行三十里。申時。到臨邑縣界隻龍村張家。晚來雨下。主人心平。
113
[4월] 8일, 일찍 출발하여 정서쪽으로 25리를 가서 임제현(臨濟縣)註 838 註 839에 이르러 윤씨 집에 들어가 단중註 840하고 곧 출발했다. 어떤 상인이 쌀 5되를 보시했다. 시장을 지나 정서쪽으로 30리를 가서 오후 4시경에 임읍현(臨邑縣)註 841 땅의 쌍룡촌(雙龍村) 장씨 집에 도착했다. 저녁 무렵에 비가 내렸다. 주인은 마음씨가 평온하였다.
114
註) 838 수나라 개황 6년(586)에 설치되어 당대에는 濟州 관할 하에 있었다. 지금의 臨濟鎭이다.
115
註) 839 임제현(臨濟縣)은 지금의 임제진(臨濟鎭)이다. 임제현은 수 개황 6년(586)에 설치되어 당나라 때에는 제주(濟州) 관하에 있었다. 북송 함평 4년(1001)에 폐지되어 장구현(長邱縣)과 합병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61쪽).
116
註) 840 단중(斷中)에서 中은 낮 12시이다. 단중은 낮 12시경을 의미하는 구어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본 기록을 처음으로 하여 이후 약 70회나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계율에서는 낮 12시를 넘겨서 식사를 하는 것을 비시(非時) 또는 비시식(非時食)라고 하여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단중은 낮 12시 이후에는 식사를 단절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적산에서 체류 중일 때 원인은 그 구어적 불여를 학습했다고 생각되고, 가끔씩 사용하였다. 체류 중 음(陰, 49기일)의 별칭으로 단칠(斷七)·종칠(終七)·진칠(盡七) 등을 사용하는데, 종중(終中)·진중(盡中)와 같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단칠과 단중은 같은 어법이다. 게다가 斷은 從·盡과 뜻이 거의 비슷하다. 또 돈황변문(敦煌變文)의 《大目乾連冥間救母變》에 “단오(短午)”가 보이는데, 단중과 치환 가능하다. 단중은 중국의 사료에 남겨져 있지 않은 구어이다(小野勝年, 「斷中の語義について」, 《東洋史硏究》17-4)(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5~216쪽).
117
註) 841 임읍현(臨邑縣)은 한나라 때 처음 설치되었는데, 수 개황 3년(585)에 제주(齊州)에 소속된 이래 현명이 존속되었다. 그러나 그 치소는 일정하지 않았다. 송 건륭 3년(962) 이후 임읍현 치소는 제남 동북 120리였는데, 근세까지 계속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61쪽).
120
九日朝來雨下。不得發。齋後雨晴便發。正西行十五里。到古縣。是前臨邑縣。城廓。頹夷無一官舍。先代寺舍破滅。佛像露坐。還為耕疇。甚可憂歎。向正西行十五里。到源河渡口。過河行十里。到禹城縣界鸞塘村里甫家宿。主人有道心。
121
[4월] 9일, 아침부터 비가 내려 출발할 수가 없었다. 재를 마친 후 비가 개어 곧 출발했다. 정서쪽으로 15리를 가서 고현(古縣)註 842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옛날의 임읍현이다. 성곽은 허물어져 관청 건물은 한 채도 없다. 옛날의 사원 건물도 부셔지고 허물어져, 불상은 노천에 앉아 있고 또한 경작지로 변해있어 무척 걱정되고 한탄스럽다. 정서쪽을 향해 15리를 가서 원하(源河)註 843 나루터에 도착했다. 원하를 건너 15리를 가서 우성현(禹城縣)註 844 땅의 연당촌(燕塘村)註 845에 도착해 이보씨(里甫氏)註 846 집에서 숙박했다. 주인은 도심이 있었다.
122
註) 842 고현(古縣)은 임읍현의 시성(邿城) 부근이다. 임읍현(臨邑縣)은 한나라 때 처음 설치되었는데, 수 개황 3년(585)에 제주(齊州)에 소속된 이래 현명이 존속되었다. 그러나 그 치소는 일정하지 않았다. 송 건륭 3년(962) 이후 임읍현 치소는 제남 동북 120리였는데, 근세까지 계속되었다. 원인이 통과한 고현(古縣), 즉 전 임읍현은 당 이전의 것으로, 한·육조시대의 치소로 생각된다. 이때의 임읍현은 제양현 서쪽 약25리의 고성지(古城址)에 비정되고, 이는 시성(邿城) 부근인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62~364쪽).
123
註) 843 라이샤워는 원하(源河)에 의해 누수(漊水)의 오기로 보았다. 《입당구법순례행기》를 통해 당나라 때에는 “원하”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64~365쪽).
124
註) 844 우성현(禹城縣)은 천보 원년(742)에 한나라 때에 설치된 축아현(祝阿縣)을 고쳐 우성현(禹城縣)이라고 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66~367쪽).
125
註) 845 연당촌(燕塘村)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65쪽).
126
註) 846 라이샤워는 이보(里甫)를 황보(皇甫)의 오기로 보았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는 어떤 곳에 도달해서, 어떤 집에 숙박하였다고 기록했던 것이 일반적인 예이기 때문에, 이(里)를 성이고 보(甫)는 이름으로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65쪽).
129
十日平明發。正西行四十里。未時。到禹城縣。縣市粟米一斗卌五文。粳米一斗百文。小豆一斗十五文。麵七八十文。過城西行十里。到仙公村趙家宿。通夜雷電雹雨。至曉雷雨止。主人無道心。
130
[4월] 10일, 날이 밝을 무렵에 출발해 정서쪽으로 40리를 가서 오후 2시경에 우성현 註 847에 도착했다. 현의 시장에서는 속미 1말에 45문註 848, 갱미 1말에 100문, 소두 1말에 15문, 보릿가루는 1말에 70, 80문이었다. 성을 지나 서쪽으로 10리를 가서 선공촌(仙公村)에 도착해 조씨 집에서 숙박했다. 밤새도록 천둥과 번개가 치고 우박과 비가 내리다가 새벽에 이르러 천둥과 비가 그쳤다. 주인은 도심이 없었다.
131
註) 847 우성현(禹城縣)은 천보 원년(742)에 한나라 때에 설치된 축아현(祝阿縣)을 고쳐 우성현(禹城縣)이라고 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66~367쪽).
132
註) 848 당대의 쌀 가격은 태종 정관 4년(630)에는 풍년으로 인해 1두에 4,5문이라고 한다(《신당서》 식화지) 고종 인덕 2년(665)에도 또 풍년으로 1두에 5전(《신당서》 본기), 현종 시대는 개원 12년(724)의 풍년 때 낙양에서는 1두에 15문, 청제 즉 산동지방에서는 1두에 5문이었고(《자치통감》 권212), 개원 28년에는 장안에서는 1두에 20문 이하였고(《구당서》 본기), 천보 4~6년 기재에 의하면 감숙의 사주지방에서는 천보 4~6년에 27~32문이었으며(那派利貞, 《唐天寶時代の河西道邊防軍に關する經濟史料》), 천보 12년은 100문이었다(《사주문록보》) 중당(中唐) 시대가 되면 풍년이라도 쌀 가격은 점점 높아져 정원 3년(787)에는 1두에 150문이었고(《자치통감》 권233), 육지(陸贄)에 의하면 장안에서는 1두에 37문, 회남에서는 150문이었다고 한다(《융선공주의》 권9) 또 《보천자(寶泉子)》(저자 미상)에 의하면 만당(晩唐) 시대(선종~의종)에는 장안에서는 1두에 40문 전후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보면 국초에는 1두에 10문 이하였고, 성당시대에 이르러 20문 전후, 중·만당 시대에는 40문 전후였다. 이는 즉 개원통보 40매 전후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근이나 전란, 혹은 화폐 가치의 변동 등이 있으면 1두가 800문에서 1000문이 된 예도 없지는 않다. 게다가 개성 시대는 거의 해마다 황해를 입어서 흉년이었기 때문에 산동에서도 평소 양경(兩京) 지방의 배 이상의 곡물 가격이었다. 특히 청주성 내에서의 1두 80문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한 고가라고 할 수 있다. 원인이 곳곳의 곡물 가격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탁발이나 보시에 의해서 식사를 했던 것 외에, 본인 스스로 곡물의 구입한 경우도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53~255쪽).
135
十一日卯時發。正西行卅里。午時。到黃河渡口。時人喚為藥家口。水色黃渥([□@考]渥池本作泥)駛流如箭。河闊一町五段許。向東流也。黃河源出崑崙山。有九曲。六曲在土蕃國。三曲在大唐國。渡口南北兩岸。各有渡口。城南北各四町有餘。東西各一町許。此藥家口。多有舟船貪載往還人。每人出五文。一頭驢十五錢。河南屬齊州禹城縣。河北屬德州南界。過河北岸斷中。四人每人喫四椀粉粥。主人驚恠。多喫冷物。恐不消化矣。正西行三十五里。申時。到德州平原縣界趙舘村趙家宿。主人無道心。
136
[4월] 11일, 오전 6시경에 출발해 정서쪽으로 30리를 가서 12시경에 황하 註 849 나루터註 850에 도착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곳을 약가구(藥家口)라 불렀다. 물 색깔은 누런 진흙색이어도 물살은 화살과 같이 빨리 흘렀다. 강의 너비는 1정註 851 5단註 852 정도 되며 동쪽으로 흘렀다. 황하는 곤륜산(崐崘山)註 853에서 발원하는데 아홉 굽이가 있다. 6번째 굽이는 토번국(土蕃國)註 854 註 855에 있고 3번째 굽이는 당나라에 있다. 나루의 남북 양안에는 나루터 성이 있는데 남북이 각각 4정 정도이며 동서는 각각 1정 정도가 된다. 이 약가구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많아, 왕래하는 사람들을 서로 태우려 하였다. 배 삯은 한 사람당 5문이고 노새 한 마리는 15전이다.황하의 남쪽은 제주(齊州)註 856 註 857 우성현 註 858에 속하고 북쪽은 덕주(德州)註 859 註 860 남쪽 땅에 속한다. 황하를 건너 북안에서 단중註 861했다. 네 사람은 각기 네 사발의 죽을 먹었다. 주인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며
137
“찬 음식을 그렇게 많이 먹으면 소화가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138
라 하였다. 정서쪽으로 35리를 가서 오후 4시경에 덕주 평원현(平原縣)註 862 땅의 조관촌(趙館村)註 863에 도착해 조씨 집에서 숙박했다. 주인은 도심이 없었다.
139
註) 849 황하(黃河)는 예부터 자주 하도(河道)가 바뀌었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우성현에서 선공촌을 지나 약 40리에서 포구에 도착한다고 하는데, 이는 가장 믿을 수 있는 기록이다. 현재 그 지점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옛 하도(河道)의 흔적이 보이는데, 《태평쇠우기(太平衰宇記)》에서는 현 남쪽 70리라고 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68~369쪽).
140
註) 850 황하는 예부터 가끔 하도를 바꾸어가며 흘렀다. 당대의 하도에 관한 기록은 《원화군현지》 권17 안덕현(安德縣)조에 보면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고 하고 있다. 우성현과의 관계는 언급이 없다. 그런데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우성현에서 선공촌(仙公村)을 거쳐 약 40여 리를 가서 황하도구인 약가구에 이르렀다고 하고 있다. 당대의 자료로는 가장 정확하다고 하겠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80쪽).
141
註) 851 1정(町)=360척(尺)=60보(步)=109m(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69쪽).
142
註) 852 60보(步)가 1정(町)이고, 5정은 1리(里)이다. 따라서 1정은 300척(尺)인데, 곡척(曲尺)의 계산에 따르면 360척이 된다. 단(段)은 정(町)과 같은데, 면적과 척도의 경우가 있다. 면적은 대화 2년의 반전법(班田法)의 규정에 따라서 1정은 10단, 1단은 50대(代), 1정은 360보이다. 즉 1단은 36척이다. 당시는 고려척에 따랐기 때문에 1보는 5척평방이고, 척도는 1정이 60보, 1단은 6보이다. 즉 1보가 5척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69쪽).
143
註) 853 昆侖山 혹은 崑崘산이라고도 쓴다. 서쪽으로 파미르 고원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淸海省에서 四川省 서북부를 거쳐 新疆과 티베트를 관통하는 산이다. 하늘에 닿을 만큼 높고 寶玉이 나는 명산으로 전해졌으나, 戰國時代 이후 神仙說이 유행함에 따라 곤륜산에는 瑤池와 낭원 등의 仙境이 있다 하였고, 산중에 不死의 물이 흐르고 선녀인 西王母가 살고 있다는 신화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사기》 권63에 의하면, 황하는 곤륜산에서 발원한다고 하였다.
144
註) 854 7세기 초부터 9세기에 걸쳐서 티베트, 청해지방에 자리를 잡고 번영한 통일왕조이다.
145
註) 855 토번국(土蕃國)은 토번국(吐藩國)이라고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남량(南涼)의 독발씨(禿髮)가 나라를 세웠는데, 독발이 잘못 전해져 토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71~372쪽).
146
註) 856 북위 皇興 3년(469)에 산동성 歷城縣에 설치된 이래 북송 정화 6년(1126)까지 지속되었다. 당대에는 역성을 비롯하여 우성현, 임읍현 등 9현을 관할하였다. 옛날부터 제주는 산동지방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147
註) 857 제주(齊州)는 북위 황흥 3년(469) 산동성 역성현에 설치된 이래 북송 정화 6년(1126)까지 존속되었다. 그 치소는 현제 제남시이다. 당나라 때에는 역성을 비롯하여 우성현, 임읍현, 장구현 등 9현을 관할하였다. 예부터 제주는 산동지방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72쪽).
148
註) 858 우성현(禹城縣)은 천보 원년(742)에 한나라 때에 설치된 축아현(祝阿縣)을 고쳐 우성현(禹城縣)이라고 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66~367쪽).
149
註) 859 황하를 경계로 하여 제주는 하남도에 속하고 덕주는 하북도에 속하였다. 덕주는 수나라 개황 3년(583)에 처음 설치되었고 무덕 4년(621)에는 주위의 6개 현을 관할했는데, 이때 平原縣이 덕주에 속하게 되었다.
150
註) 860 당나라 때 황하를 경계로 하여 제주(齊州)는 하남도에 속하고, 덕주(德州)는 하북도에 속하였다. 덕주는 수 개황 3년(583)에 처음 설치되었고, 안덕현을 관할하였다. 무덕 4년(621)에는 부근의 6현을 관할했는데, 평원현(平原縣)도 이때 덕주에 속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72쪽).
151
註) 861 단중(斷中)에서 中은 낮 12시이다. 단중은 낮 12시경을 의미하는 구어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본 기록을 처음으로 하여 이후 약 70회나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계율에서는 낮 12시를 넘겨서 식사를 하는 것을 비시(非時) 또는 비시식(非時食)라고 하여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단중은 낮 12시 이후에는 식사를 단절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적산에서 체류 중일 때 원인은 그 구어적 불여를 학습했다고 생각되고, 가끔씩 사용하였다. 체류 중 음(陰, 49기일)의 별칭으로 단칠(斷七)·종칠(終七)·진칠(盡七) 등을 사용하는데, 종중(終中)·진중(盡中)와 같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단칠과 단중은 같은 어법이다. 게다가 斷은 從·盡과 뜻이 거의 비슷하다. 또 돈황변문(敦煌變文)의 《大目乾連冥間救母變》에 “단오(短午)”가 보이는데, 단중과 치환 가능하다. 단중은 중국의 사료에 남겨져 있지 않은 구어이다(小野勝年, 「斷中の語義について」, 《東洋史硏究》17-4)(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5~216쪽).
152
註) 862 평원현(平原縣)은 한나라 때 처음 세워졌다. 현재 현 남쪽 약 30리에 있는 장관점(張官店)의 남쪽 근처에 장공성(張公城)이라고 하는 옛 성이 있다. 이는 한나라 때 평원현 치소였다고 생각된다. 이 부근에서 원인의 행로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 장공성의 지점에서 남쪽 변두리를 서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72~373쪽).
153
註) 863 하천의 범람 등으로 인해 지리적 정황이 변했기 때문에, 조관촌(趙館村)의 위치를 비롯한 일행이 온 길을 명확히 알기 어렵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73쪽).
156
十二日早發。正西行卌里。到沛州夏津縣界形開村趙家斷中。主人有道心。施齋飯。菜疏飽足。齋後發。西行卅里。到夏津縣界。孟家莊([□@考]莊恐店字)孫家宿。主人有道心。
157
[4월] 12일, 일찍 출발해 정서쪽으로 40리를 가서 패주(沛州)註 864 하진현(夏津縣)註 865 註 866 땅의 형개촌(形開村)註 867에 도착해 조씨 집에서 단중註 868했다. 주인은 도심이 있었다. 공양할 밥을 보시하고 채소를 풍족하게 주었다. 재를 마친 후 서쪽으로 30리를 가서 하진현 땅의 맹가장(孟家莊)註 869에 이르러 손씨 집에서 묵었다. 주인은 도심이 있었다.
158
註) 864 하진현(夏津縣)이 패주(貝州) 관할에 속한 점으로부터 추측했을 때, 패(沛)는 패(貝)로 고쳐야 한다. 패주는 북주가 건덕 6년(577)에 북제를 멸하고 패구(貝邱)라는 이름에 근거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후 청하군(淸河郡)이라고 고쳐진 적도 있지만, 당 무덕 4년(621) 고조는 이 지방에 근거하고 있었던 두건덕(竇建德)을 멸하고, 패주를 설치하였다. 두건덕은 그 지방의 농민 출신으로, 하국(夏國)을 세워 하왕(夏王)이라 칭하고, 5년간 하북 지방에 웅거하고 있었다. 패주는 청하현, 무성현, 장남현, 역정현, 청양현, 유현, 하진현 7현을 관할했다. 천보 원년(742)에는 9현이 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73~374쪽).
159
註) 865 무덕 4년(621)에 淸陽縣으로부터 분치되었다가 곧 폐지되었다. 그후 천보 원년(742)에 兪縣을 개명하여 다시 설치되었다.
160
註) 866 하진현(夏津縣)은 무덕 4년(621)에 청양현(淸陽縣)에서 분치된 것으로, 무덕 9년(626)에 곧 폐지되었고, 천보 원년(742)에 새롭게 유현(鄃縣)을 개명하여 하진현으로 다시 설치되었다(《구당서》 권39 지리지) 이후 그 현은 청대까지 존속되었는데, 1958년 이후 산동성 무성현과 합병해 유성전구에 들어가 있다. 원인 일행은 하진현에 들르지 않고, 그 북쪽 지점을 서진해서 패주(貝州)로 향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73~374쪽).
161
註) 867 형개촌(形開村)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74쪽).
162
註) 868 단중(斷中)에서 中은 낮 12시이다. 단중은 낮 12시경을 의미하는 구어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본 기록을 처음으로 하여 이후 약 70회나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계율에서는 낮 12시를 넘겨서 식사를 하는 것을 비시(非時) 또는 비시식(非時食)라고 하여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단중은 낮 12시 이후에는 식사를 단절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적산에서 체류 중일 때 원인은 그 구어적 불여를 학습했다고 생각되고, 가끔씩 사용하였다. 체류 중 음(陰, 49기일)의 별칭으로 단칠(斷七)·종칠(終七)·진칠(盡七) 등을 사용하는데, 종중(終中)·진중(盡中)와 같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단칠과 단중은 같은 어법이다. 게다가 斷은 從·盡과 뜻이 거의 비슷하다. 또 돈황변문(敦煌變文)의 《大目乾連冥間救母變》에 “단오(短午)”가 보이는데, 단중과 치환 가능하다. 단중은 중국의 사료에 남겨져 있지 않은 구어이다(小野勝年, 「斷中の語義について」, 《東洋史硏究》17-4)(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5~216쪽).
163
註) 869 맹가장(孟家莊)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74쪽).
166
十三日發。西行卅五里。到王淹村王家斷中。主人足道心施齋飯。齋後西行卅五里。申時到唐州城裏開元寺宿。見說。中丞申節度使。於開元寺新開壇場。牒報街衢。令人知聞。從諸州來受戒僧四百有餘。昨日壇場罷。新戒僧盡散去(云々)。見未發者。只有三十餘人也。寺綱維。具錄日本國僧等來由。報中丞。
167
[4월] 13일, 출발하여 서쪽으로 35리를 가서 왕엄촌(王淹村)註 870에 도착해 왕씨 집에서 단중註 871했다. 주인은 도심이 두터워 공양할 밥을 보시했다. 재를 마친 후 서쪽으로 35리를 가서 오후 4시경에 당주성(唐州城)註 872 註 873 안의 개원사에 도착해 숙박했다. 말하는 것을 듣건대註 874
168
“중승(中丞)註 875 註 876이 절도사註 877에게 말하여 개원사에 새로 계단(戒壇)註 878을 개설하고, 거리에 첩문으로 통보해 사람들이 알도록 하였다. 그래서 여러 주에서 와 계를 받은 승려가 400여 명이었다. 어제 계단을 파하여 새로 계를 받은 승려들은 모두 흩어져갔다.”
169
운운하였다. 아직 떠나지 않은 승려는 단지 30여 명뿐이었다. 개원사 강유註 879가 일본국 승려들이 온 사유를 갖추어 기록해 중승에게 보고하였다.
170
註) 870 왕엄촌(王淹村)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75쪽).
171
註) 871 단중(斷中)에서 中은 낮 12시이다. 단중은 낮 12시경을 의미하는 구어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본 기록을 처음으로 하여 이후 약 70회나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계율에서는 낮 12시를 넘겨서 식사를 하는 것을 비시(非時) 또는 비시식(非時食)라고 하여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단중은 낮 12시 이후에는 식사를 단절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적산에서 체류 중일 때 원인은 그 구어적 불여를 학습했다고 생각되고, 가끔씩 사용하였다. 체류 중 음(陰, 49기일)의 별칭으로 단칠(斷七)·종칠(終七)·진칠(盡七) 등을 사용하는데, 종중(終中)·진중(盡中)와 같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단칠과 단중은 같은 어법이다. 게다가 斷은 從·盡과 뜻이 거의 비슷하다. 또 돈황변문(敦煌變文)의 《大目乾連冥間救母變》에 “단오(短午)”가 보이는데, 단중과 치환 가능하다. 단중은 중국의 사료에 남겨져 있지 않은 구어이다(小野勝年, 「斷中の語義について」, 《東洋史硏究》17-4)(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5~216쪽).
172
註) 872 당대 하북도에는 당주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는 貝州의 오기가 아닐까 한다.
173
註) 873 초본(抄本)은 당주(唐州)라 하고 있다. 당나라 때 하북도에는 당주가 설치되지 않았다. 따라서 당주는 패주(貝州)의 오기로 보인다. 패주의 치소는 현재 청하현 서북쪽 약 10리에 해당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75~377쪽).
174
註) 874 견설(見說)은 구어체로 ‘듣는다’라는 뜻이다. 견도(見道)·문설(聞說)·문도(聞道)등과 거의 같은 말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82쪽).
175
註) 875 어사중승의 약칭으로, 율령과 궁중의 전적, 공경의 탄핵 등을 담당하는 어사대의 차관직이다. 그런데 中唐 이래 주의 刺史가 어사중승을 겸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중승은 貝州刺史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176
註) 876 중승(中丞)은 어사중승(御史中丞)의 약칭이다. 한나라 때 이래로 어사대부 밑의 차관으로써 법무와 관련된 일, 궁중의 전적비서, 공경의 탄핵 등을 담당하였다. 어사대부의 위치는 높아져서 대사공(大司空)이 되었고, 중승이 대신해 어사대의 장관이 되었다. 당에서는 본래로 되돌아와, 어사대부의 차관으로써 정원은 2명이었다. 단 《신당서》 백관지에서는 3명이었다고 한다. 관위는 정4품하였다. 그런데 중당(中唐) 시대가 되면 자사가 겸임을 하든지, 산관으로써 어사중승에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자사, 단련사, 방어사, 관찰사가 중승을 겸임하였다. 후에 더 심해져서 부사, 병마사, 도압아, 도우후, 행군사마와 같은 낮은 관직도 어사중승에 임명되었다. 중당 이래 자사는 거의 어사중승을 겸하고 있던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그 결과 어사중승은 존칭으로서 사용되었다. 여기에서의 중승도 패주자사(貝州刺史)를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77~378쪽).
177
註) 877 여기에서는 위박절도사를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78쪽).
178
註) 878 계단원(戒壇院)은 내부에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 건물을 가리킨다. 당나라 때의 계단에 대해서는 거의 기술을 빠뜨리고 있기 때문에 간략하게 있어도 중요하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0~381쪽).
179
註) 879 강유(綱維)는 사원의 사무를 맡은 삼강(三綱), 즉 사주(寺主)·상좌(上座)·유나(維那)를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86~87쪽).
182
十四日。朝衙入州參見中丞。中丞家裏。設一十僧齋。便赴中丞請。於使宅裏齋。齋後却到寺住。晚際。入戒壇院。見新置壇場。壘塼二層。下階四方各二丈五尺。上階四方各一丈五尺。高下層二尺五寸。上層二尺五寸壇色青碧。時人云。取瑠璃色(云々)。
183
[4월] 14일, 아침 집무 시간에 주註 880에 들어가 중승을 만나 뵈었다. 중승의 집에서 10명의 승려에게 재를 베풀었는데, 문득 중승이 초청하여 그 집註 881에서 재를 들었다. 재를 마친 후 물러나와 절에 도착해 머물렀다. 저녁 무렵에 계단원(戒壇院)註 882에 들어가 새로 설치한 단장(壇場)註 883을 보았다. 그것은 벽돌을 2층을 쌓은 것인데, 아래 층계는 사방이 각각 2장 5척이고 위 층계는 사방이 각각 1창 5척이었다. 높이는 아래 층계가 2장 5촌이고 위 층계도 2장 5척이다. 계단의 색깔은 푸른 옥색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186
註) 880 패주(貝州) 관아를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79쪽).
187
註) 881 원문은 使宅이다. 자사가 종종 관찰사를 겸임했기 때문에 그 저택을 경칭했던 것으로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0쪽).
188
註) 882 건물의 내부에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 데서 온 이름인 듯하다. 당대에는 계단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각지의 절도사들이 계단을 설치하여 도첩을 팔아 군비로 충당한 예가 허다하다. 이 계단도 그러한 예에 속한 것인지 모르겠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83쪽).
189
註) 883 제를 지내는 마당[壇墠]이나 어떤 특수한 일을 닦는 곳[壇墠]을 뜻하며, 여기에서는 계단(戒壇)이 설치된 곳을 가리킨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71쪽).
192
十五日。於城內[A25]劉家斷中。飯食如法。齋後入善光寺見尼眾戒壇。堂裏縣幡鋪席。以繩界地不置壇。平地鋪著。以為戒壇明日起首。可行道受戒。晚衙入州辭中丞。
193
[4월] 15일, 성 안의 유씨(劉氏) 집에서 단중註 884했다. 법식대로 밥을 먹었다. 재를 마친 후 선광사(善光寺)에 들어가 비구니들의 계단을 보았다. 당 안에는 번(幡)註 885을 달고 자리를 깔았으며 줄로 땅을 구분해 놓았다. 단(壇)은 설치하지 않고 평지에 자리를 깔아註 886 계단(戒壇)으로 삼았다. 내일부터 시작해 행도(行道)註 887하고 계를 받는다고 한다. 오후 집무 시간 때 주에 들어가 중승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194
註) 884 단중(斷中)에서 中은 낮 12시이다. 단중은 낮 12시경을 의미하는 구어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본 기록을 처음으로 하여 이후 약 70회나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계율에서는 낮 12시를 넘겨서 식사를 하는 것을 비시(非時) 또는 비시식(非時食)라고 하여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단중은 낮 12시 이후에는 식사를 단절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적산에서 체류 중일 때 원인은 그 구어적 불여를 학습했다고 생각되고, 가끔씩 사용하였다. 체류 중 음(陰, 49기일)의 별칭으로 단칠(斷七)·종칠(終七)·진칠(盡七) 등을 사용하는데, 종중(終中)·진중(盡中)와 같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단칠과 단중은 같은 어법이다. 게다가 斷은 從·盡과 뜻이 거의 비슷하다. 또 돈황변문(敦煌變文)의 《大目乾連冥間救母變》에 “단오(短午)”가 보이는데, 단중과 치환 가능하다. 단중은 중국의 사료에 남겨져 있지 않은 구어이다(小野勝年, 「斷中の語義について」, 《東洋史硏究》17-4)(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5~216쪽).
195
註) 885 번(幡)은 범어로 pataka이다. 불보살의 장엄함을 공양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불전(佛殿)의 안팎에 장식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2쪽).
196
註) 886 원문은 鋪着인데, 구어로 “敷”이다. “착(着)”은 진행형을 나타내는 말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2쪽).
197
註) 887 행도(行道)는 법회 때 승려들이 줄을 지어 산화(散花)하고 송경(誦經)·찬패(讚貝)하며 본존을 중심으로 도는 의식이다. 요불(繞佛) 또는 선요(旋繞)라고도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2쪽).
200
十六日平明發。西行廿里。到清河縣界合章流村[A26]劉家斷中。喫榆葉羹。主人雖未解佛法。自出齋飯與僧等斷中。齋後發。西北卌里。到冀州南宮縣界趙固村趙家宿。主人心直。
201
[4월] 16일, 날이 밝을 무렵에 출발하여 서쪽으로 20리를 가서 청하현(淸河縣) 땅의 합장류촌(合章流村)註 888에 도착해 유씨 집에서 단중註 889했다. 느릅나무 잎으로 만든 국을 먹었다. 주인은 비록 불법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직접 공양 밥을 내와 승려 등과 함께 단중했다. 재를 마친 후 출발하여 서북쪽으로 40리를 가서 익주(翼州)註 890 남궁현(南宮縣) 땅의 조고촌(趙固村)註 891에 도착해 조씨 집에서 숙박했다. 주인은 마음이 곧았다.
202
註) 888 청하현(淸河縣) 합장류촌(合章流村)은 현재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장(章)과 장(漳)은 음이 통하기 때문에, 합장류촌(合章流村)은 고장하(古漳河)에 근거해 마을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3쪽).
203
註) 889 단중(斷中)에서 中은 낮 12시이다. 단중은 낮 12시경을 의미하는 구어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본 기록을 처음으로 하여 이후 약 70회나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계율에서는 낮 12시를 넘겨서 식사를 하는 것을 비시(非時) 또는 비시식(非時食)라고 하여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단중은 낮 12시 이후에는 식사를 단절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적산에서 체류 중일 때 원인은 그 구어적 불여를 학습했다고 생각되고, 가끔씩 사용하였다. 체류 중 음(陰, 49기일)의 별칭으로 단칠(斷七)·종칠(終七)·진칠(盡七) 등을 사용하는데, 종중(終中)·진중(盡中)와 같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단칠과 단중은 같은 어법이다. 게다가 斷은 從·盡과 뜻이 거의 비슷하다. 또 돈황변문(敦煌變文)의 《大目乾連冥間救母變》에 “단오(短午)”가 보이는데, 단중과 치환 가능하다. 단중은 중국의 사료에 남겨져 있지 않은 구어이다(小野勝年, 「斷中の語義について」, 《東洋史硏究》17-4)(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5~216쪽).
204
註) 890 익주(翼州)라는 이름은 이미 《상서》 우공편에 보이는 9주 중 하나이다. 원래는 그 지역이 매우 광범하여, 하북·산서·하남·황하 이북·열하까지도 포함했다. 한 이후 지역은 요약·축소되었는데, 북위 이후 하북성의 익현(翼縣)을 중심으로 한정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4쪽).
205
註) 891 남궁현(南宮縣) 조고촌(趙固村)은 현재 어디인지 알 수 없다. 그 지방에는 현재 곽고(郭固)·반고(潘固)라고 기록한 지명이 존재하고 있다. “고(固)”는 “고(故)”와 음이 통하는데, “조고(趙固)”는 조씨 취락에 근거한 지명으로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5~386쪽).
208
十七日早朝。主人施粥飯。正北行十五里。西北行十五里。到南宮縣入城裏張家斷中。出城西北行五十里。人家希。到唐陽([□@考]陽池本作楊非也)縣。入城內覺觀寺宿。寺舍破落。無有僧徒。只有知寺僧一人。見客不慇懃。房床鋪設。惣不勾當。
209
[4월] 17일, 이른 아침에 주인이 죽을 보시했다. 정북쪽으로 15리를 가서 다시 서북쪽으로 15리를 가 남궁현 註 892에 도착했다. 성 안으로 들어가 장씨 집에서 단중註 893했다. 성을 나아 서북쪽으로 50리를 갔는데 인가가 드물었다. 당양현(唐陽縣)註 894에 도착하여 성 안의 각관사(覺觀寺)에 들어가 숙박했다. 절 건물은 부셔져 허물어졌으며 승려들은 없고 다만 지사승(知寺僧)註 895 한 명만 있었다. 손님을 보아도 친절하지 않았다. 방의 침상 시설물들이 모두 관리되지 않았다.
210
註) 892 현재 남궁현(南宮縣)의 서북쪽에 인접해서 남북구성(南北舊城)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곳은 옛날 남궁현의 유지로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5~386쪽).
211
註) 893 단중(斷中)에서 中은 낮 12시이다. 단중은 낮 12시경을 의미하는 구어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본 기록을 처음으로 하여 이후 약 70회나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계율에서는 낮 12시를 넘겨서 식사를 하는 것을 비시(非時) 또는 비시식(非時食)라고 하여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단중은 낮 12시 이후에는 식사를 단절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적산에서 체류 중일 때 원인은 그 구어적 불여를 학습했다고 생각되고, 가끔씩 사용하였다. 체류 중 음(陰, 49기일)의 별칭으로 단칠(斷七)·종칠(終七)·진칠(盡七) 등을 사용하는데, 종중(終中)·진중(盡中)와 같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단칠과 단중은 같은 어법이다. 게다가 斷은 從·盡과 뜻이 거의 비슷하다. 또 돈황변문(敦煌變文)의 《大目乾連冥間救母變》에 “단오(短午)”가 보이는데, 단중과 치환 가능하다. 단중은 중국의 사료에 남겨져 있지 않은 구어이다(小野勝年, 「斷中の語義について」, 《東洋史硏究》17-4)(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5~216쪽).
212
註) 894 당양현(唐陽縣)은 당양현(堂陽縣)의 오기로 보인다. 당양은 당수의 남쪽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에 이름을 붙여졌는데, 한대에 설치된 현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6~387쪽).
213
註) 895 절을 총괄하는 승려로 주지승과 같은 의미이다.
216
十八日平明發。向正西行卅里。到新河口。入城南家斷中。從西門出。過新河橋正西行卅里。平原遙遠。人家希絕。到趙州界寧晉縣東唐城寺宿。寺極貧疎僧心庸賤。
217
[4월] 18일, 날이 밝을 무렵에 출발하여 정서쪽으로 30리를 가서 신하구(新河口)註 896에 도착해 성에 들어가 남씨 집에서 단중註 897했다. 서문으로부터 나와 신하교를 지나 정서쪽으로 30리를 가니 평원은 요원하고 인가는 거의 끊어졌다.註 898 조주(趙州)註 899 땅의 영진현(寧晋縣)註 900 동쪽의 당성사(唐城寺)註 901에 도착해 숙박했다. 절은 매우 가난하여 볼품이 없었고,註 902 승려의 마음씨는 용렬하고 천박했다.
218
註) 896 신하구(新河口)는 5대의 신하진(新河鎭), 송 초의 신하현(新河縣)이라고 생각된다. 4월 7일조 주 참조(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8쪽).
219
註) 897 단중(斷中)에서 中은 낮 12시이다. 단중은 낮 12시경을 의미하는 구어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본 기록을 처음으로 하여 이후 약 70회나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계율에서는 낮 12시를 넘겨서 식사를 하는 것을 비시(非時) 또는 비시식(非時食)라고 하여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단중은 낮 12시 이후에는 식사를 단절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적산에서 체류 중일 때 원인은 그 구어적 불여를 학습했다고 생각되고, 가끔씩 사용하였다. 체류 중 음(陰, 49기일)의 별칭으로 단칠(斷七)·종칠(終七)·진칠(盡七) 등을 사용하는데, 종중(終中)·진중(盡中)와 같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단칠과 단중은 같은 어법이다. 게다가 斷은 從·盡과 뜻이 거의 비슷하다. 또 돈황변문(敦煌變文)의 《大目乾連冥間救母變》에 “단오(短午)”가 보이는데, 단중과 치환 가능하다. 단중은 중국의 사료에 남겨져 있지 않은 구어이다(小野勝年, 「斷中の語義について」, 《東洋史硏究》17-4)(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5~216쪽).
220
註) 898 원문의 ‘希絶’은 매우 드물다, 혹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85쪽).
221
註) 899 원래는 한의 平棘縣이었다. 북제 때 조주로 개칭되었다가 수대에 폐지되었으나 당 무덕 원년(618)에 다시 설치되었다. 주위의 12개 현을 관할하는 大州였다.
222
註) 900 영진현(寧晋縣)은 천보 원년(742)에 영진현(寧晋縣)이라고 한 이래, 오늘날까지 치소 및 현명이 변경되지 않았다. 현재 영진현은 조현(趙縣)과 신하현(新河縣)이 합병한 것이고, 석가장전구(石家莊專區)에 소속해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8쪽).
223
註) 901 영진현에서 현 동쪽의 당성사(唐城寺)라고 한 것은 성 안의 현 공서 동쪽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데, 성 밖에 있지 않다. 이는 19일조에 “조주 남쪽의 개원사”라고 한 예를 봐도 명확하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8쪽).
224
註) 902 원문 '貧疏'의 소는 조(粗)와 같은 뜻이다. 가난하고 너절하다. 조잡하다는 뜻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85쪽).
227
十九日辰時。發穿城內西北行十五里。到秦丘村[A27]劉家斷中。主人雖貧。布施齋飯。午時發。西北行廿五里。熱氣如蒸。到趙州南開元寺宿。屋舍破落。佛像尊嚴。師僧心鄙。怕見客僧。
228
[4월] 19일, 오전 8시경에 출발하였다. 성 안을 통과하여註 903 서북쪽으로 15리를 가서 진구촌(秦丘村)註 904에 도착해 유씨 집에서 단중註 905했다. 주인은 비록 가난하였으나 공양 밥을 보시하였다. 낮 12시경에 출발하여 서북쪽으로 25리를 갔다. 더운 열기가 찌는 듯했다. 조주 註 906 남쪽의 개원사註 907에 도착해 숙박했다. 건물은 부셔져 허물어졌으나 불상은 존엄한 모습이었다. 사승(師僧)의 마음씨는 비루하여 객승 만나보기를 두려워했다.
229
註) 903 남문으로 들어가 북문을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9쪽).
230
註) 904 영진현과 조현을 연결하는 길로써 진구(秦邱)라는 지명이 현존하고 있다. 진구촌(秦丘村)은 이곳을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9쪽).
231
註) 905 단중(斷中)에서 中은 낮 12시이다. 단중은 낮 12시경을 의미하는 구어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본 기록을 처음으로 하여 이후 약 70회나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계율에서는 낮 12시를 넘겨서 식사를 하는 것을 비시(非時) 또는 비시식(非時食)라고 하여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단중은 낮 12시 이후에는 식사를 단절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적산에서 체류 중일 때 원인은 그 구어적 불여를 학습했다고 생각되고, 가끔씩 사용하였다. 체류 중 음(陰, 49기일)의 별칭으로 단칠(斷七)·종칠(終七)·진칠(盡七) 등을 사용하는데, 종중(終中)·진중(盡中)와 같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단칠과 단중은 같은 어법이다. 게다가 斷은 從·盡과 뜻이 거의 비슷하다. 또 돈황변문(敦煌變文)의 《大目乾連冥間救母變》에 “단오(短午)”가 보이는데, 단중과 치환 가능하다. 단중은 중국의 사료에 남겨져 있지 않은 구어이다(小野勝年, 「斷中の語義について」, 《東洋史硏究》17-4)(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5~216쪽).
232
註) 906 여기에서 조주(趙州)는 조주의 관청을 가리킨다. 조주는 북제 때 처음 설치되어, 수나라 때 폐지되었고 그 후 또 조군(趙郡)이 설치되었다. 당에서는 무덕 원년(618)에 조주라고 고쳤는데, 평자현을 관하에 설치하였다. 얼마 안 있어 부근의 12현을 관할한 대주(大州)가 되었는데, 그 후 관할하는 수가 9현으로 줄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9~391쪽).
233
註) 907 개원사(開元寺)는 당 개원 26년 전국 각주에 설치된 사찰이다. 조주(趙州) 성 내에도 설치되었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주 남쪽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주치의 남쪽에 위치했다고 해석해야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91쪽).
236
廿日平明喫粥。西北行卌里。到鎮州鸞城縣城外孫家斷中。向西北行三十里。到鎮州大廓縣界作護驛㔁家宿。主人賊心笇人。
237
[4월] 20일, 날이 밝을 무렵에 죽을 먹었다. 서북쪽으로 40리를 가서 진주(鎭州)註 908 난성현(鸞城縣)註 909에 도착해 성 밖의 손씨 집에서 단중註 910했다. 서북쪽을 행해 30리를 가서 진주 대곽현(大廓縣)註 911 註 912 땅의 작호역(作護驛)註 913에 도착해 유씨 집에서 숙박했다. 주인은 도적 심보가 있어 사람을 재어보았다.
238
註) 908 秦 이래로 恒山郡, 常山郡 등으로 불리다가 당초에는 恒州라 하였다. 元和 15년(820)에 穆宗의 휘가 恒이기 때문에 진주로 개칭하였다.
239
註) 909 원문에는 난성현(鸞城縣)으로 되어 있으나, 《구당서》 권29 지리지 하북도 진주조에 의거하면 난성현(欒城縣)이라 하는 것이 타당하다. 난성현은 한 개현(開縣)의 후신으로, 후한에 이르러 처음으로 난성(欒城)이라고 불렸다. 그 후 폐지되었고, 북위 태화 11년(487) 부활하였다. 당시는 조주 관하였는데, 당 대력 3년(789)에 항주(진주)로 이관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92쪽).
240
註) 910 단중(斷中)에서 中은 낮 12시이다. 단중은 낮 12시경을 의미하는 구어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본 기록을 처음으로 하여 이후 약 70회나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계율에서는 낮 12시를 넘겨서 식사를 하는 것을 비시(非時) 또는 비시식(非時食)라고 하여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단중은 낮 12시 이후에는 식사를 단절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적산에서 체류 중일 때 원인은 그 구어적 불여를 학습했다고 생각되고, 가끔씩 사용하였다. 체류 중 음(陰, 49기일)의 별칭으로 단칠(斷七)·종칠(終七)·진칠(盡七) 등을 사용하는데, 종중(終中)·진중(盡中)와 같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단칠과 단중은 같은 어법이다. 게다가 斷은 從·盡과 뜻이 거의 비슷하다. 또 돈황변문(敦煌變文)의 《大目乾連冥間救母變》에 “단오(短午)”가 보이는데, 단중과 치환 가능하다. 단중은 중국의 사료에 남겨져 있지 않은 구어이다(小野勝年, 「斷中の語義について」, 《東洋史硏究》17-4)(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5~216쪽).
241
註) 911 당대 문헌에는 大廓縣이라는 지명이 없다. 지금의 欒城縣 서북쪽의 獲鹿縣의 동쪽에 大郭村이란 지명이 있는데, 혹시 이곳을 가리키는지 모르겠다.
242
註) 912 당대 문헌에는 대곽현(大廓縣)이라는 지명이 없다. 단 지금의 난성현(欒城縣) 서북쪽의 획록현(獲鹿縣)의 동쪽에 대곽촌(大郭村)이라는 지명이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92~393쪽).
243
註) 913 작호역(作護驛)은 난성현(欒城縣)과 정정현(正定縣)을 연결하는 도로 중간으로, 북포(획록현) 혹은 대마촌(정정현) 부근에 해당한다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92~393쪽).
246
廿一日早發。正北行卅里。到鎮州節度府。入城西南金沙禪院。不見斷中。有二僧。見客嗔慢。撥遺數度。強入院中修飡。主人歸。心。自作餺飩與客僧。齋後向正北行廿里。到使庄楊家宿。此庄即鎮州前節度使。王大尉之庄。大尉墓堂安在於中。主([□@考]主恐王字)節度使家人守墓見在。有一軍將姓[A28]劉。勾當墓堂精妙。南行一里。建碑堂。築立高垣。不交開者。大尉薨後。經今三世(云々)。主人有道心。於客慇懃。
247
[4월] 21일, 일찍 출발하여 정북쪽으로 30리를 가서 진주절도부 註 914에 이르렀다. 성의 서남쪽에 있는 금사선원(金沙禪院)註 915에 들어갔으나 단중註 916을 하지 못했다. 두 승려가 객을 보고는 성을 내고 업신여기며 쫓아내기를 여러 차례 하였다. 억지로 선원에 들어가 음식을 지어 먹었다. 주인은 마음을 되돌려 직접 박탁(餺飥)註 917을 만들어 객승에게 주었다. 재를 마친 후 정북쪽으로 20리를 가서 절도사의 장원註 918에 이르러 양씨(楊氏) 집에서 묵었다. 이 장원은 곧 진주의 전 절도사 왕태위(王太尉)註 919 註 920의 장원이다. 태위의 묘당(墓堂)은 그 안에 있으며 왕절도사(王節度使)의 가인(家人)이 묘를 지킨다. 현재는 성이 유씨인 군장(軍將) 한 사람이 관리하고 있는데, 묘당은 정묘하였다. 남쪽으로 1리를 가니 비각이 세워져 있었는데, 담을 높이 쌓아 열고 들여다보지 못하게 해 놓았다. 태위가 죽은註 921 후 지금까지 3대가 지났다고 하였다. 주인은 도심이 있어, 손님에게 친절했다.
248
註) 914 진주(鎭州)에 대해서 《구당서》 권29 지리지에 의하면, 당초에 항주(恒州)라고 불렀는데, 원화 15년(820)에 진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원인이 진주를 통과할 때 도독부장관은 원규(元逵)였는데, 실제로 절도부에 있었는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전후의 사정으로 추측해 보면 장안에 계속 머물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94~397쪽).
249
註) 915 금사선원(金沙禪院)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97쪽).
250
註) 916 단중(斷中)에서 中은 낮 12시이다. 단중은 낮 12시경을 의미하는 구어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본 기록을 처음으로 하여 이후 약 70회나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계율에서는 낮 12시를 넘겨서 식사를 하는 것을 비시(非時) 또는 비시식(非時食)라고 하여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단중은 낮 12시 이후에는 식사를 단절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적산에서 체류 중일 때 원인은 그 구어적 불여를 학습했다고 생각되고, 가끔씩 사용하였다. 체류 중 음(陰, 49기일)의 별칭으로 단칠(斷七)·종칠(終七)·진칠(盡七) 등을 사용하는데, 종중(終中)·진중(盡中)와 같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단칠과 단중은 같은 어법이다. 게다가 斷은 從·盡과 뜻이 거의 비슷하다. 또 돈황변문(敦煌變文)의 《大目乾連冥間救母變》에 “단오(短午)”가 보이는데, 단중과 치환 가능하다. 단중은 중국의 사료에 남겨져 있지 않은 구어이다(小野勝年, 「斷中の語義について」, 《東洋史硏究》17-4)(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5~216쪽).
251
註) 917 박탁(餺飥)은 밀가루로 만든 떡의 일종으로, 반탁(飰飥)·부탁(不托)·餢飳 등으로도 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95쪽).
252
註) 918 여기에서 절도사의 장원은 왕씨 일족의 장원을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97쪽).
253
註) 919 王武俊(753~801)을 가리킨다. 그는 거란 출신으로 李寶臣의 뒤를 이어 成德節度使가 되어 진주 일대를 통치하였다. 그후 檢校太尉가 되었으며 사후에는 太師로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과 손자들이 절도사를 이어 계승하였다.
254
註) 920 태위(太尉)는 절도사의 존칭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에 왕 태위는 왕무후(王武俊, 753~801)라고 생각된다. 그는 흥원 원년(784) 성덕군절도사(成德節度使)가 되었고, 정원 12년(796) 검교태위(檢校太尉)가 되었다. 그는 사후에 이르러 처음으로 태사(太師)로 추증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99쪽).
255
註) 921 《예기》 곡례에 의하면 천자의 죽음은 붕(崩), 제후의 죽음은 훙(薨)이라고 한다. 《개원례》 권3에 의하면 3품 이상이 죽으면 훙이라고 하고, 《신당서》 권46 백관지에서는 2품 이상이 죽으면 훙이라 한다고 한다. 《양로령》에도 친왕과 3위 이상이 죽으면 훙이라 한다고 한다. 3품 이상이 맞는 것 같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99쪽).
258
廿二日早朝。主人施粥。向正北行廿里。到南接村[A29]劉家斷中。主人從來發心。長設齋飯。供養師僧。不限多少。入宅不久。便供飯食。婦人出來慰客數遍。齋了喫茶。向正北行廿五里。到鎮州界行唐縣。入城內西禪院宿。有廿餘禪僧。心極閙亂。
259
[4월] 22일, 이른 아침에 주인이 죽을 보시했다. 정북쪽을 향해 20리를 가서 남루촌(南樓村)註 922에 도착해 유씨 집에서 단중註 923했다. 주인은 이전부터 불교에 귀의한 사람으로, 오랜 기간 동안 재를 베풀어 승려들을 공양했는데 사람 수의 많고 적음에 상관하지 않았다.註 924 집으로 들어간 지 오래지 않아 곧 음식을 제공하였다. 부인이 나와 여러 차례 손님들을 위로하였다. 재를 마치고 차를 마셨다. 정북쪽을 향해 25리를 가서 진주 땅의 행당현(行唐縣)註 925에 도착해 성 안으로 들어가 서선원(西禪院)註 926에서 숙박했다. 20여 명의 선승이 있었는데, 마음이 매우 소란스럽고 난잡하였다.
260
註) 922 초본(抄本)은 南接이라고 하는데, 이는 南樓의 오기이다. 남루촌(南樓村)은 정정현과 행당현을 연결하는 도로로, 남루·북루의 지명이 존재하고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00~401쪽).
261
註) 923 단중(斷中)에서 中은 낮 12시이다. 단중은 낮 12시경을 의미하는 구어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본 기록을 처음으로 하여 이후 약 70회나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계율에서는 낮 12시를 넘겨서 식사를 하는 것을 비시(非時) 또는 비시식(非時食)라고 하여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단중은 낮 12시 이후에는 식사를 단절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적산에서 체류 중일 때 원인은 그 구어적 불여를 학습했다고 생각되고, 가끔씩 사용하였다. 체류 중 음(陰, 49기일)의 별칭으로 단칠(斷七)·종칠(終七)·진칠(盡七) 등을 사용하는데, 종중(終中)·진중(盡中)와 같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단칠과 단중은 같은 어법이다. 게다가 斷은 從·盡과 뜻이 거의 비슷하다. 또 돈황변문(敦煌變文)의 《大目乾連冥間救母變》에 “단오(短午)”가 보이는데, 단중과 치환 가능하다. 단중은 중국의 사료에 남겨져 있지 않은 구어이다(小野勝年, 「斷中の語義について」, 《東洋史硏究》17-4)(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5~216쪽).
262
註) 924 독신자가 장기적으로 재를 베풀어 행하였다는 기사로서 주의해볼 만하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01쪽).
263
註) 925 행당(行唐)이라는 이름은 전국시대의 조(趙)나라에 보이고, 한 대에는 남행당현(南行唐縣)이라고 개칭하였다. 북위 때 행당현이 되었고, 당에서는 측천무후 장수 2년(693)에 장무(章武)로 고쳐졌는데, 중종 즉위 후(705) 다시 옛 이름을 복구시키고, 근세까지 바뀌지 않았다. 1958년 행정 개혁으로 신악현(新樂縣)에 합병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01쪽).
264
註) 926 행당성 안에는 봉숭사(封崇寺)가 있다. 이것은 북제 천보 연간(550~559) 창건된 고찰인데, 서선원(西禪院)과의 관계는 알 수 없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01~402쪽).
267
廿三日早朝喫粥。向西北行廿五里。到黃山八會寺斷中。喫隶飯([□@考]隶或黍字歟)。時人稱之為上房。普通院長有飯粥。不論僧俗來集。便僧([□@考]僧字恐衍)宿。有飯即與。無飯不與。不妨僧俗赴宿。故曰普通院。院中有兩僧。一人心開。一人心鬱。有一黃毛狗。見俗嗔咬。不憚杖打。見僧人。不論主客。振尾猥馴。齋後向西北。入山尋谷行。時人喚之。為國信山。從上房行得廿里。到[A30]劉使普通院宿。便遇五臺山金閣寺僧義深等往深州求油歸山。五十頭驢。駄油麻油去。又見從天台國清寺僧巨堅等四人。向五臺誥云。天台國清寺。日本國僧一人。弟子沙彌一人。行者一人。今見在彼中住(云々)。
268
[4월] 23일, 이른 아침에 죽을 먹었다. 서북쪽을 향해 25리를 가서 황산(黃山)註 927 팔회사(八會寺)에 도착해 단중註 928했다. 수수밥을 먹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상방보통원(上房普通院)註 929이라 일컬었다. 거기에는 항시 밥과 죽이 마련되어 있어 승려나 속인을 막론하고 와서 모여 숙박했다. 밥이 있으면 주고 없으면 주지 않는다. 승려나 속인을 가리지 않고 거리낌없이 이르러 숙박하였으므로 보통원註 930이라 하였다. 보통원 안에는 2명의 승려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마음이 개방적이었고 한사람은 마음이 어두웠다. 누렁이 개 한 마리가 있어, 속인을 보면 짖고 물었는데 지팡이로 때려도 막무가내였다. 승려를 보면 주인과 손님을 가리지 않고 꼬리를 흔들며 잘 따랐다. 재를 마친 후 서북쪽을 향해 산으로 진입하여 골짜기를 따라 갔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국신산(國信山)이라 불렀다. 상방보통원에서 20리를 가서 유사보통원(劉使普通院)註 931에 도착해 묵었다. 문득 오대산 금각사(金閣寺) 승려 의심(義深) 등을 만났다. 그들은 심주(深州)註 932에 가서 기름을 구해 산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50마리의 나귀에 유마(油麻)註 933 기름을 싣고 갔다. 또 천태산 국청사註 934에서 온 승려 거견(居堅) 등 4명이 오대산으로 가는 것을 만났다. 말하기를
269
“천태 국청사에는일본국 승려 1명, 제자 사미 1명, 행자 1명이 지금 그곳에 머물고 있다.”註 935
271
註) 927 황산(黃山)은 하북성 곡양현에 소속되어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03쪽).
272
註) 928 단중(斷中)에서 中은 낮 12시이다. 단중은 낮 12시경을 의미하는 구어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본 기록을 처음으로 하여 이후 약 70회나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계율에서는 낮 12시를 넘겨서 식사를 하는 것을 비시(非時) 또는 비시식(非時食)라고 하여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단중은 낮 12시 이후에는 식사를 단절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적산에서 체류 중일 때 원인은 그 구어적 불여를 학습했다고 생각되고, 가끔씩 사용하였다. 체류 중 음(陰, 49기일)의 별칭으로 단칠(斷七)·종칠(終七)·진칠(盡七) 등을 사용하는데, 종중(終中)·진중(盡中)와 같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단칠과 단중은 같은 어법이다. 게다가 斷은 從·盡과 뜻이 거의 비슷하다. 또 돈황변문(敦煌變文)의 《大目乾連冥間救母變》에 “단오(短午)”가 보이는데, 단중과 치환 가능하다. 단중은 중국의 사료에 남겨져 있지 않은 구어이다(小野勝年, 「斷中の語義について」, 《東洋史硏究》17-4)(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5~216쪽).
273
註) 929 보통은 불교 용어에서 普通供養 혹은 普遍通至 등의 뜻이고, 원은 순례자들을 위해 설치한 시설로 숙박과 휴식 그리고 식사 등을 제공하였다. 일반적으로 보통원은 20, 30리 정도에 하나씩 설치하였는데, 순례자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寄進한 재물로 유지하였다. 보통원에는 해당 원을 맡아서 경영, 관리하는 승려가 상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기진물을 송달하는 送供使도 있었다.
274
註) 930 승속(僧俗)을 가리지 않고 순례자에게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는 숙박소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74쪽).
275
註) 931 유사보통원(劉使普通院)은 팔회사(八會寺)와 양령구를 연결하는 도로 위, 동성자변(東城子邊)에 비정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09쪽).
276
註) 932 심주(深州)의 치소는 하북성의 안평현, 요양현, 육택현 등을 전전하고, 북송 옹희 2년(925)에 폐지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09쪽).
277
註) 933 한대 張騫이 大宛으로부터 유마의 종자를 가지고 왔으므로 胡麻라고도 한다.
278
註) 934 국청사(國淸寺)는 천태산의 유명한 사찰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09쪽).
279
註) 935 일본국 승려 일행은 유학승 원재(圓載), 사미 임호(任好), 행자 시만(始滿)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09쪽).
282
廿四日天陰。發從山谷。西北行廿五里。見遇一羊客駈五百許羊行。過一嶺。到兩嶺普通院。院主不在。自修食。院中曾未有粥飯。緣近年蟲災。今無粮食。齋後乘山谷行。西北三十里。到菓菀普通院宿。雷鳴降雨。
283
[4월] 24일, 하늘이 흐렸다. 출발하여 산골짜기를 따라 서북쪽으로 25리를 가다가 한 양치는 사람註 936이 500여 마리의 양을 몰고 가는 것을 보았다. 산마루 하나를 넘어 가 양령보통원(兩嶺普通院)註 937에 도착했다. 원주가 없어 스스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이 보통원에는 일찍이 죽이나 밥을 준 적이 없었다. 근년에 메뚜기 떼의 재해註 938로 지금은 양식이 없기 때문이다. 재를 마친 후 산을 오르고 골짜기를 따라 서북쪽으로 30리를 가서 과원보통원(菓苑普通院)註 939에 도착해 숙박했다.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다.
284
註) 936 원문은 양객(羊客)인데, 양치기이다. 이는 전객은 소작인, 엽객은 엽사, 어객은 어부, 사객은 문장가를 지칭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10쪽).
285
註) 937 양령보통원(兩嶺普通院)은 팔회사(八會寺)에서 사하(沙河)를 지나 산중으로 들어가, 서북쪽 방향으로 나아가면 부평현 근처에 양령구가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11쪽).
286
註) 938 메뚜기의 재해는 예부터 북중국 지방에 많이 발생해 농해를 입었다. 명(明)의 서광계(徐光啓)의 《농정전서(農政全書)》 권44 제황소(除蝗疏)에 의하면, 재해의 발생 시기는 4월부터 8월까지로, 6월에 가장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유충을 蝻이라고 하는데, 며칠 동안 떼지어 날아다니는 것을 蝗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물이 가득차거나 갑자기 고갈되는 큰 못에서 태어나는데, 하북의 남쪽 안휘(安徽)·강소(江蘇) 이북, 산동의 서쪽 및 협서(陜西)·하남(河南) 동쪽의 호탄(湖灘) 땅이 발생지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87~189쪽).
287
註) 939 과원보통원(菓苑普通院)은 어디인지 알 수 없는데, 혹 괴수저촌(槐樹底村) 근처라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11쪽).
289
- 메뚜기 떼의 재해로 양식 얻기가 어렵다
290
廿五日雨下。普通院。深山無粥飯。喫少豆為飯。從趙州已來直至此間。三四年來有蝗蟲災。五穀不熟。粮食難得。齋後雨停尋谷向西。行三十里。到解([□@考]解上下恐有脫字)普通院。巡禮五臺山。送供人僧尼女人。共一百餘人。同在院宿。
291
[4월] 25일, 비가 내렸다. 이 보통원은 깊은 산중에 있어 죽이나 밥이 없고 소두를 밥 대신으로 먹었다. 조주(趙州)에서부터 이곳에 이르는 사이 3, 4년간 메뚜기 떼의 재앙註 940이 있어 오곡이 익지 않아 양식 얻기가 어려웠다. 재를 마친 후에 비가 그쳤다. 골짜기를 따라 서쪽으로 30리를 가서 해탈보통원(解脫普通院)註 941 註 942에 도착하였다. 오대산을 순례하는 송공인(送供人),註 943 남녀 승려, 여인註 944 등 모두 100여 명이 함께 이 원에서 숙박했다.
292
註) 940 메뚜기의 재해는 예부터 북중국 지방에 많이 발생해 농해를 입었다. 명(明)의 서광계(徐光啓)의 《농정전서(農政全書)》 권44 제황소(除蝗疏)에 의하면, 재해의 발생 시기는 4월부터 8월까지로, 6월에 가장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유충을 蝻이라고 하는데, 며칠 동안 떼지어 날아다니는 것을 蝗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물이 가득차거나 갑자기 고갈되는 큰 못에서 태어나는데, 하북의 남쪽 안휘(安徽)·강소(江蘇) 이북, 산동의 서쪽 및 협서(陜西)·하남(河南) 동쪽의 호탄(湖灘) 땅이 발생지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87~189쪽).
293
註) 941 원문에는 解普通院이라 하였으나. 의미상 해탈보통원의 오기로 보인다.
294
註) 942 초본(抄本)에는 解普通院이라 하였는데, 解脫普通院이 맞다. 해탈보통원의 소재지는 법화촌으로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12~413쪽).
295
註) 943 보시공양물을 산으로 운반하는 역인(役人)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75쪽).
296
보시공양물을 오대산으로 운송하는 사람이다. 중앙이나 지방 관아에서 사찰로 보시물을 운송하는 사람을 송공사라고 하였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90쪽).
297
註) 944 다수의 여성 순례자를 주의해야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13쪽).
300
廿六日天晴。喫粥了。向行山谷廿里。到淨水普通院修飡。院中貧乏。山風漸凉。青松連嶺。踰兩重嶺。西行卅里到塘城普通院。過院西行。嶺高谷深。翠峰吐雲。谿水瀉綠流。從塘城西行十五里。申時。到龍泉普通院宿。後丘上龍堂裏。出泉清冷。院近此泉。喚為龍泉普通院。院有飯粥。
301
[4월] 26일, 날씨가 맑았다. 죽을 먹은 후 서쪽을 향해 산골짜기 길을 20리 가서 정수보통원(淨水普通院)註 945에 도착해 음식을 지어 먹었다. 이 보통원은 가난하고 궁핍했다. 산바람이 점차 서늘해졌다. 푸른 소나무가 산마루에 이어져 있다. 중첩된 두 개의 산 고개를 넘어 서쪽으로 30리를 가서 당성보통원(塘城普通院)註 946에 이르렀다. 이 보통원을 지나 서쪽으로 갔는데, 산마루는 높고 골짜기는 깊었다. 비취색 봉우리는 구름을 토하고 계곡의 물은 녹색을 쏟아내며 흘렀다.註 947 당성보통원에서 서쪽으로 15리를 가서 오후 4시경에 용천보통원(龍泉普通院)註 948에 도착해 숙박했다. 뒤편 언덕 위의 용당(龍堂)에서 맑고 차가운 샘물이 흘러 나왔다. 보통원이 이 샘 가까이에 있어 용천보통원이라 부른다. 이 보통원에는 죽과 밥이 있었다.
302
註) 945 부평현(阜平縣)에서 용천관(龍泉關)에 이르는 도로에 성수촌(聖水村)이라는 부락이 있다. 정(淨)과 성(聖)은 음이 달라도 음이 통한다. 부평현에서 서쪽으로 약 25리 전후, 법화촌에서는 20리 전후에 있다. 정수보통원(淨水普通院)은 성수촌 근처에 있었다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14쪽).
303
註) 946 당성보통원(塘城普通院)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용왕묘 부근이라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14쪽).
304
註) 947 이를 통해 당시 이 부근에 수목이 많았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14쪽).
305
註) 948 《속사방여기요》 권14, 《대청일통지》 권18은 모두 용천관과 부평현의 거리가 70리라고 하고 있다. 용천관에는 상관과 하관이 있는데, 하관은 명 정통 2년(1437)에, 상관은 경태 2년(1451)에 축조되었고, 서로의 거리는 20리라고 한다. 그 70리는 두 관의 어느 쪽인지 명확하게 보이지 않지만, 《대청일통지》 장성령의 주에서 추측하면 상관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구상(丘上)에 용당이 있고, 그곳에서 샘이 솟기 때문에 그 용왕묘지를 찾으면 용천보통원의 위치를 결정할 수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14쪽).
308
廿七日發。從山谷向西行廿里。到張花普通院。共九僧斷中。院有粥飯。齋後行谷十里。到㭟鋪普通院。過院西行十里。踰大復嶺。嶺東谿水向東流。嶺西谿水向西流。過嶺漸下。或向西行。或向南行。峯上松林。谷裏樹木。直而且長。竹林麻園。不足為喻。山巖崎峻。欲接天漢。松翠碧與青天相映。嶺西木葉未開張。草未至四寸。從㭟鋪行卅里。薄暮。到角詩普通院宿。院無粥飯。
309
[4월] 27일, 출발하여 산골짜기를 따라 서쪽을 향해 20리를 가서 장화보통원(張花普通院)註 949에 이르러 9명의 승려와 함께 단중註 950했다. 이 보통원에는 죽과 밥이 있었다. 재를 마친 후 골짜기 길을 10리 가서 다포보통원(茶鋪普通院)에 도착했다. 보통원을 지나 서쪽으로 10리를 가서 대복령(大復嶺)註 951을 넘었다. 대복령의 동쪽은 계곡물이 동쪽으로 흐르고 대복령의 서쪽은 계곡물이 서쪽으로 흘렀다. 대복령을 지나 점차 내려가 서쪽으로 가기도 하고 혹은 남쪽으로 가기도 했다. 산봉우리 위의 송림과 계곡의 수목은 곧고 길게 뻗어, 대숲註 952이나 삼밭註 953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다. 산의 바위는 우뚝 솟아 하늘에 맞닿으려 하고 소나무의 검푸른 빛은 푸른 하늘과 서로 비추고 있다. 산마루 서쪽의 나뭇잎은 아직 열려 펼쳐지지 않았고 풀의 키는 아직 4촌(寸)에도 이르지 않았다. 다포보통원에서 30리를 가서 어스름할 무렵에 각시보통원(角詩普通院)註 954에 도착해 숙박했다. 이 원에는 죽과 밥이 없었다.
310
註) 949 장화보통원(張花普通院)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장화보통원을 상관(上關)에 비정한다면 용천보통원에 비정한 하관(下關)의 거리는 20리에 해당한다. 대복령(장성령)과의 거리도 합치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18쪽).
311
註) 950 단중(斷中)에서 中은 낮 12시이다. 단중은 낮 12시경을 의미하는 구어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본 기록을 처음으로 하여 이후 약 70회나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계율에서는 낮 12시를 넘겨서 식사를 하는 것을 비시(非時) 또는 비시식(非時食)라고 하여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단중은 낮 12시 이후에는 식사를 단절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적산에서 체류 중일 때 원인은 그 구어적 불여를 학습했다고 생각되고, 가끔씩 사용하였다. 체류 중 음(陰, 49기일)의 별칭으로 단칠(斷七)·종칠(終七)·진칠(盡七) 등을 사용하는데, 종중(終中)·진중(盡中)와 같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단칠과 단중은 같은 어법이다. 게다가 斷은 從·盡과 뜻이 거의 비슷하다. 또 돈황변문(敦煌變文)의 《大目乾連冥間救母變》에 “단오(短午)”가 보이는데, 단중과 치환 가능하다. 단중은 중국의 사료에 남겨져 있지 않은 구어이다(小野勝年, 「斷中の語義について」, 《東洋史硏究》17-4)(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5~216쪽).
312
註) 951 대복령(大復嶺)은 대행산맥의 분수령인데, 하북과 산서 경계에 있다는 것은 《입당구법순례행기》의 명기(明記)라고 할 수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18쪽).
313
註) 952 이와 같은 한냉지에서 죽림은 육성 곤란한 상황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수식이라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18쪽).
314
註) 953 녹원(鹿園)으로 기록된 판본도 있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75쪽).
315
註) 954 각시보통원(角詩普通院)은 원래 시자보통원(詩觜普通院)과 있었다. 그 위치를 지명과 거리로부터 추측하면, 현재 석취(石嘴)에 해당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18쪽).
318
([□@考]廿八日至五月五日記事凡)廿八日。入平谷。西行(三十二行再出第三卷初兩文相異以線示之)卅里。巳時。到停點普通院。未入院中。向西北。望見中臺。伏地禮拜。此即文殊師利境地。五頂之圓高。不見樹木。狀如覆銅盆。遙望之會。不覺流淚。樹木異花不同別處。奇境([□@考]境字有疑)特深。此即清凉山金色世界。文殊師利現在利化。便入停點普通院。禮拜文殊師利[A31]菩薩像。因見西亭壁上。題云。日本國內供奉翻經大德靈仙。元和十五年九月十五日。到此蘭若(云々)。院中僧等見日本國僧來。奇異示以壁上之題。故記著之。
319
[4월] 28일, 註 955평평한 골짜기에 진입하여 서쪽으로 30리를 가서 오전 10시경에 정점보통원(停點普通院)註 956에 도착했다. 보통원 안에 들어가지 않고 서북쪽을 향해 멀리 중대(中臺)를 바라보고 땅에 엎드려 예배했다. 이곳은 곧 문수사리가 계시던 곳이다. 다섯 봉우리註 957는 둥글고 높은데 수목註 958이 보이지 않았다. 그 모양은 마치 구리 화분을 엎어놓은 형상이었다. 멀리 바라보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수목과 기이한 꽃들도 다른 곳과 같지 않아 그 기이한 경지는 특별히 심오했다. 이곳은 곧 청량산(淸凉山) 금색세계(金色世界)註 959로, 문수사리가 현재에도 중생을 이롭게 교화하는 곳이다. 곧 정점보통원註 960에 들어가 문수사리보살상에 예배하였다. 인하여 서쪽 정자 벽에 보니
320
“일본국 내공봉(內供奉)註 961 번경대덕(翻經大德) 영선(靈仙)註 962이 원화(元和)註 963 15년 9월 15일에 이 난야註 964에 도착했다.”
321
운운하는 제명이 적혀 있었다. 보통원 안이 승려 등이일본국 승려들이 온 것을 기이하게 여겨 벽 위의 제명을 가리켜주었으므로 그것을 기록해 둔다.
322
註) 955 이날부터 5월 16일까지 7일간의 기사는 권3과 중복 기재되어 있으며, 그 내용도 字句의 상호 출입이 있다. 여기서는 권2의 기사를 중심으로 하되 권3에만 있는 내용을 보완해 번역한다.
323
註) 956 본 내용에는 서쪽으로 갔다고 하고 있다. 현재 청수하를 따라 서북쪽으로 거술러 올라가면 길 중간에 백운사(白雲寺)와 황토저(黃土咀)가 있다. 정점보통원(停點普通院)은 이 지역을 가리키는 것 같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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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957 오대산의 이름은 이 다섯 봉우리에서 비롯된다. 동으로부터 동대(망해봉), 북대(협두봉), 중대(취령봉), 서대(계월봉), 남대(금수봉)가 있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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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958 오대산 정상에 수목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은 당 법장(法藏)의 《화장전기(華藏傳記)》 권1에도 보인다. 《입당구법순례행기》의 5월 20일조에도 또한 중요하게 오대의 절반 높이로부터 위에까지는 수목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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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959 《大方廣佛華嚴經》에 의하면, 문수사리가 청량산에서 그의 권속 1만 명 보살과 함께 상주하며 설법하고, 문수사리가 설법하는 세계를 금색세계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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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960 2권과 3권의 큰 의미는 동일한데, 행문(行文)의 차이가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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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961 궁중 내도량에서 불교 행사에 봉사하는 승관명이다. 중국에서는 당 숙종 至德 원년(756)에 元皎를 내봉공에 임명한 것이 처음이고, 일본에서는 寶龜 3년(772)이 처음이었다. 영선의 경우는 당에서 받은 것인지 일본에서 받은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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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962 奈良 興福寺의 승려로, 연력 23년(804)에 견당사를 따라 입당하여 장안 醴泉寺 반야삼장 아래에서 역경에 종사하였다. 그 뒤에 오대산의 여러 산원에 머물다 靈境寺 浴室院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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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963 당 헌종 때의 연호로, 원화 15년은 82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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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964 난야(蘭若)는 범어 aranya(阿蘭若)의 약칭이다. 수업에 적합한 고요한 집으로, 이를테면 정사(精舍)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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午時食堂裏齋。齋後見有數十僧遊南臺去。暮際雷鳴雨下。自廿三日申時入山。至于今日。入山谷行。都經六日。未盡山源得到五臺。自去二月十九日。離赤山院。直至此間。行二千三百餘里。除却虛日。在路行正得卌四日也。慙愧。在路竝無病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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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12시경에 식당에서 재를 들었다.위 승려의 자리를 보니 문수보살상이 안치되어 있고 빈두루(賓頭盧)註 965註 966의 좌상을 안치된 것을 보지 못했다. 괴이하게 여겨 여러 승려들에게 물어보니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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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였다.재를 마친 후 수십명의 승려들이 남대를 순례하기 위해 떠나는 것을 보았다. 해질 무렵에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다.잠깐 사이에 맑은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바람과 구름이 어둠을 다투더니 비가 내리고 우박이 떨어졌다.註 967저녁 무렵에 그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았더니 우박에 맞아 삿갓이 망가지고 온 몸이 젖어서 왔다. 23일 오후 4시경 [처음으로] 입산하여 오늘까지 [매일] 산과 골짜기를 걸은 것이 도합 6일이 경과했다. 아직 산의 근원지를 다 보지 못했으나 오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난 2월 19일에적산원을 떠나 바로 여기에 이르기까지 2,300여 리를 걸었다. 헛되이 보낸 날을 제외한다 해도 길을 걸은 날은 정확히 44일註 968이다. 다행스럽게도 길에서 아무도 병을 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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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965 16나한 중의 하나로, 말세에 중생 구제를 맡는다고 한다. 서역과 중국에서는 문수보살과 빈두루가 같은 당 안에 안치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오대산 정점보통원의 벽에는 문수보살만 있고 빈두루가 없어 圓仁이 기이하게 여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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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966 빈두루(賓頭盧)는 범어로 Pindolabharadvaja이다. 16나한의 하나로, 신통력이 있었고, 말세에 중생 구제를 맡은 존자이다. 서역과 중국에서 문수상과 빈두루상을 같은 당 안에 안치한 것이 일반적인데, 후세에는 그 좌위(座位)에 대해서 논의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24~4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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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967 전후 문장 뜻에 따라 29일 기사를 이곳으로 옮긴다. 권3에서는 28일 기사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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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968 실제 보행일은 41일인데, 문등현에서 머물렀던 4일, 등주에서 9일, 청주에서 11일, 패주에서 2일, 그 외 비로 인한 1일을 더하면 총 합쳐서 68일이 된다. 또한 보행한 리수(里數)에 대해서 보면, 3월 17일이 90리로 가장 많고, 4월 17일은 80리,였다. 그 후 7일간 70리, 9일간 65리 내지 60리, 10일간 55리 내지 50리, 그 이하 약 12간이다. 오전의 보행은 오후에 비교해서 작은데, 일반적으로 오전은 20~30리, 오후가 30~40리이다. 또한 80~90일과 같은 강행의 경우는 그 다음날 대개 능률이 떨어져서 20~30리 감소하고 있다. 따라서 1일간의 보행은 평균 60리 전후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25~4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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廿九日停點院設百齋([□@考]齋恐衍)僧齋赴請同齋。因台州國清寺僧巨堅歸本寺。付書二封。送圓載上人所。齋後見數十僧巡禮南臺去。一上時晴天忽陰。風雲𩰖暗。零雨降雹。晚際見其歸來。被雹打破笠子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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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9일, 정점원에서 100명의 승려에게 재註 969를 베풀었다. 초청을 받고 가서 함께 재를 들었다. [또] 태주 국청사 승려 거견(居堅)註 970이 [오대산을 순례하고] 본래의 절로 돌아가므로 서신 2통을 부쳐 원재상인(圓載上人) 註 971이 있는 곳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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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969 원문은 百僧齋인데, 초본(抄本)에서는 百齋僧이라 한다. 순태(巡台)라는 신자가 시주한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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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970 권3에는 “거견(巨堅), 순태(巡台)가 본사로 돌아갔다”고 한다. 4월 23일에 황산 팔회사(八會寺)에서 서로 만나고 있기 때문에 전후해서 오대산에 오른 것이 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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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971 지혜(智慧)와 덕(德)을 겸비한 스님에 대한 존칭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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