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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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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 경인팔경(京仁八景)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작품. 【본문】효창원(孝昌園) 춘경(春景) / 노합(老閤)은 붉을시고 고림(古林)만 검소와라 / 종다리 높이 뜨고 신이화(莘荑花) 만산(滿山)토다 / 혼원(渾圓)이 개춘색(皆春色)커늘 엇지타 나만 홀로 |
2 장. 경주기행(慶州紀行)의 일절(一節) |
| 우현 고유섭의 기행문(紀行文) 【본문】고요한 마음과 매인 데 없는 몸으로 청산(靑山)엘 홀로 거닐어 보자. 창해(蒼海)에 홀로 떠 보자. 가다가 며칠이라도 머물러 보고, 싫증이 나거든 돌아서도 보고, |
3 장. 고난(苦難)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작품. 【본문】나는 몹시도 빈궁(貧窮)하기를 바랐다. 난관(難關)이 많기를 바랐다. 나를 못살게 구는 사람이 많기를 바랐다. 부모도 형제도 붕우(朋友)도, 모두 나에게 고통을 주고 불행을 주는 이들이기를 바랐다. |
4 장. 고려관중시(高麗館中詩) 두 수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작품. 【본문】『해동역사(海東繹史)』에『고극정중주집(高克正中州集)』에서 끌어 온 채송년(蔡松年)의 「고려관중시(高麗館中詩)」 두 수라는 것이 있다. |
5 장. 고려청자와(高麗靑瓷瓦)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고려시대 미술공예품으로 도자공예(陶磁工藝)가 그 수로도 그 질로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데, 그 유명한 고려도자가 함집(咸集)된 것이 이 개성박물관(開城博物館)의 특색이며, |
6 장. 금강산(金剛山)의 야계(野鷄)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소동(消冬)이라는 말은 없어도 소하(消夏)라는 말은 있다. 소동이라는 말이 없는 대신에 월동(越冬)이 라는 말은 있으나 월동과 소하라는 두 개념 사이에는 넘지 못할 상극(相剋)되는 두 내용이 있다. |
7 장. 남창일속(南窓一束)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앞산에 우거진 숲 사이로 저녁 넘는 햇발이 붉게 쌓입니다. 떼 지은 까마귀는 이리로 몰리고 저리로 몰리어 산에서 소리만 요란히 냅니다. |
8 장. 만근(輓近)의 골동수집(骨董蒐集)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천하를 기유(覬覦)하던 초장왕(楚莊王)이 주실(周室)의 전세보정(傳世寶鼎)의 경중(輕重)을 물었다 하여 ”문정지경중(問鼎之輕重)“이라는 한 개의 술어(術語)가 정권혁계(政權革繼)의 야심에 대한 숙어(熟語)로 사용케 되었다 하는데, |
9 장. 명산대천(名山大川)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 산도 볼 탓이요, 물도 가릴 탓이라, 드러난 명산(名山)이 반드시 볼 만한 것이 아닐 것이며, 이름난 대천(大川)이 반드시 장한 것이 아닐 것이매, |
10 장. 무제(無題)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 일순(一瞬) 천 리의 황막(荒漠)한 광야는 고고(高高)한 벽락(碧落)과 한계가 닿았구나. 도도(島島)한 대양(大洋)도 돌아오지 아니하는 무변경(無邊境)에 잔원(潺湲)한 추수(秋水)만 흘러 드니는도다. |
11 장. 무종장(無終章)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일에 끌리지 말고 욕심에 몰리지 말고 아무 데도 구애되지 말고 아무것에도 속박되지 말고, 무심코 고요한 마음으로 청산에 거닐어 보자. |
12 장. 번역필요(飜譯必要)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남의 나라 글을 그대로 읽지 못하는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하여 이 땅의 글로 번역을 한다든지, 이 땅의 글을 그대로 읽지 못하는 남의 나라 사람을 위하여 그 나라 글로 번역한다든지, |
13 장. 브루노 타우트의 일본미의 재발견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1938년, 향년(享年) 오십칠 세로서 이스탄불(구 콘스탄티노플)에서 객사(客死)한 브루노 타우트(Bruno Taut, 180-1938)는 쾨니히스베르크(Konigsberg)의 산(産)인 근대 세계적 대건축가였다. |
14 장. 석조(夕照)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한후(旱後)의 대우(大雨)가 그치자 입추(立秋)는 서해(西海)를 넘었다. 산 없는 하늘엔 화산이 터졌다. 불 없는 지상엔 물이 넘치고·. |
15 장. 성당(聖堂)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한 간 방 서남창(西南窓)으로 우곶좌곶(右串左串) 창해(滄海)와 성당(聖堂)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 성당과 방 안엔 성(性) 다른 사람들이 학업(學業)을 닦다가 저녁 생량(生凉)할 즈음엔 소풍(消風)을 하느라고 |
16 장. 수구고주(售狗沽酒)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보음(補陰)의 묘제(妙劑)로서 조선에는 삼복(三伏)날에 개〔狗〕를 먹는 풍습이 있다. 복장(伏藏)된 금기(金氣)를 보(補)하는 의미에서일 것이다. |
17 장. 시조 한 수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시조. 【본문】범백화(凡白花) / 봄이 피고 / 천만과(千萬果) 추실(秋實)일세 / 독고죽(獨孤竹) 유절죽(有節竹)만 / 춘추(春秋) 없다 이르오니 / 어즈버 배올 것은 |
18 장. 심후(心候)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안개가 자욱하게 내렸다. 낮은 낮인 모양이나 태양광선은 볼 수도 없다. 무엇인지 검은 영자(影子)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어슴프레하게 보인다. |
19 장. 아포리스멘(Aphorismen)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 부상(扶桑) 석(釋) 표재(瓢齋)『속인어록(俗人語錄)』서문 일절에 “어제는 지났고 내일은 모르오니 세상사는 오늘뿐인가 하노라” 하는 뜻의 일구(一句)가 있다. |
20 장. 애상(哀想)의 청춘일기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팔 년 전인 1928년 8월 26일의 일기의 한 구절이다. 그때만 해도 문학청년으로의 시적(詩的) 정서가 다소 남아 있었던 듯하여 이러한 구절이 남아 있다. |
21 장. 양력(陽曆) 정월(正月)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 어느 나라이든지 한 해를 지나는 사이에 일 년의 생활고(生活苦), 일 년간의 질시반목(嫉視反目), 일 년간의 이해타산(利害打算), 이러한 것을 잊어버리고 밑이 빠지도록 통쾌히 놀던 때가 있다. |
22 장. 와제(瓦製) 보살두상(菩薩頭像)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 ① 품명 ― 와제(瓦製) 보살두상(菩薩頭像). ② 가격 ― 일금 삼십 전(錢). ③ 유래 ― 1934년 다 늦어 가는 어느 모추(暮秋)의 저녁, |
23 장. 자인정(自認定) 타인정(他認定)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 개인에게서 그 소위 자타인정(自他認定)이라는 특립(特立)된 존재가 되기는 단위 범주가 적으니만큼 비교적 용이한 일이라 하겠지만, |
24 장. 재단(裁斷)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 산다는 것은 재단(裁斷)을 가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가령 자연에 인공을 가한다는 것은 한 재단에 속한다. 그리고 자연에 인공을 가하는 것이 곧 인간의 생활상(生活相)이다. |
25 장. 전별(餞別)의 병(甁)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 ’전별(餞別)의 연(宴)’이란 것이 있다. 따라서 ‘전별의 배(盃)’란 것이 있다. ‘전별의 선물(膳物)’도 있고, ‘전별의 노래’란 것도 있다. |
26 장. 정적(靜寂)한 신(神)의 세계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 어둔 밤, 무섭게 어둔 밤, 비바람에 회오리쳐 떠나가는 낙엽 소리가 소연(騷然)한 밤, 산을 뚫고 땅을 파는 모든 악령이 이 천지를 뒤집어 놓을 듯이 |
27 장. 지방에서도 공부할 수 있을까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 1937년의 일. 저자는 조(朝)·중(中)·일(日) 삼국 간의 왕년의 미술사적 교섭을 생각하고 있던 여말(餘沫)로서 일본 화승(畵僧) 철관(鐵關)과 중암(中庵)과의 일을 |
28 장. 참회(懺悔)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 마사무네 하쿠초(正宗白鳥)는 언젠가 참회무용론(懺悔無用論)을 말한 적이 있다. 이와 같이 괴로운 것이 없고 또 불리한 것이 없다는 것이 요지였던 듯하다. |
29 장. 춘수(春愁)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봄날은 슬픈 날 / 겨울날을 지나온 / 뜰 앞에 치잣닢도 / 햇빛이 떤다 / 날은 낮 두 시 / 북쪽 나라 젓소래도 / 멀리 들려 슬거워라 / 옛날의 추억― |
30 장. 평생아자지(平生我自知)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 ‘평생을 아자지’라는 말이 나로선 매우 알기 어렵다. 어찌 보면 나 자신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 같고 또 알고 있는 것이 의당사(宜當事)일 것 같은데, |
31 장. 학난(學難)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 내가 조선미술사(朝鮮美術史)의 출현을 요망하기는 소학시대(小學時代)부터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 스스로의 원성(願成)으로 전화(轉化)되기는 대학의 재학 시부터이다. |
32 장. 해변(海邊)에 살기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시. 【본문】 소성(邵城)은 해변(海邊)이지요 / 그러나 그 성(城)터를 볼 수 없어요 / 차고 찬 하늘과 산이 입 맞출 때에 / 이는 불길이 녹혔나 보아요 |
33 장. 화강소요부(花江逍遙賦)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 해 돋는 곳과 달 뜨는 곳이 다 같은 동편(東便)이지만, 그 기점(基點)이 이곳에서는 확연히 다릅니다. 게다가 요사이는 달과 해가 꼬리를 맞대고 쫓아다닙니다. |
34 장. 회교도(回敎徒) 독후감 |
| 일제강점기의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의 글. 【본문】 “마호메트가 이 세상에 나올 제는 아버지는 벌써 없었고 어머니는 여섯 살 적에 여의었다. 유산이라고는 계집종 하나와 양 한 마리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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