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해 지자 곧 돋은 정월 대보름달을 뜰 한가운데서 맞이한 경순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일곱 시가 되기까지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으나 얼른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 경대 앞에 앉았다. 분첩으로 얼굴을 문지른 후 머리를 쓰다듬어 헤어핀을 고쳐 꽂고 치마저고리를 갈아입었다. 외투를 벗겨 착착 개켜 툇마루에 내놓고 안방으로 건너갔다.
7
어머니는 그날 밤에 놀러 오기로 약속한 동네 부인네들을 기다리며 별로 의심하는 기척도 없이 순순히 허락하였다.
9
경순은 어머니에게서 더 무슨 말이 나오기 전에 얼른 문을 닫아주고 툇마루에 놓인 외투를 집어 들고 달음질하듯 대문을 나섰다. 아직 땅거미가 들지 않아 너무 일찍 집을 나선 것이 후회되었다. 그러나 시계는 여섯 시 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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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까지 가려면 십 분은 걸릴 것이고 하니 지금 가더라도 별로 이르지는 않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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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생각이 들어 그는 총총걸음을 쳐서 뒷동산을 향하여 발길을 옮겼다. 소나무가 드문드문하게 서 있는 산비탈을 올라갈 때는 먼 데 사람이 잘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는 안심하고 소나무가 자옥한 산꼭대기를 쳐다보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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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하던 사람들은 각기 집으로 흩어져간 지 오래인 산꼭대기는 쏴하는 바람 소리만 들렸다. 그는 한 소나무 둥치에 가 몸을 기대고 섰다.
13
시계는 아직 여섯 시 사십오 분이었다. 차차 서편 하늘에는 해님이 남기고 간 마지막 빛조차 사라지고,둥근 달님 혼자서 온 천지를 비출 뿐이었다. 경순은 자주 시계만 들여다보는 사이에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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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의심까지 터져 올라 연달아 사방을 휘휘 둘러보며 초조해하였다.
16
시계가 정각 일곱 시를 가리키는 것이 달빛에 간신히 보이자 그는 무서움을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산 왼편 기슭에 있는 공동묘지 생각도 나고 소나무 가지에서 무엇이 떨어지지나 않는가 하는 생각도 났다. 그는 더 참을 수가 없어 이리저리 걸어보다가,시계가 일곱 시 십 분을 가리키자 모든 것을 단념하고 산꼭대기를 내려섰다. 산허리에는 키 작은 다복솔이 자욱하여 경순의 머리만 겨우 솔잎사귀 위에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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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이 된 후 더 무서움이 치받치어 그만 달음질을 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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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인지 사람 소리가 울려왔다. 그러나 경순은 두어 발 더 쫓으며 이 말소리를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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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좀 더 크게 바로 경순의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경순은 무서움에 정신이 아찔하여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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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를 입고 모자를 쓰지 않은 인섭이가 경순의 곁에 다가서며 급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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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은 무서움과 놀라움에 부르르 떨며 벌떡 일어나자 인섭의 가슴에 폭 안기듯이 매달렸다. 인섭은 본능적으로 두 팔로 경순을 굳게 포옹하려다가 깜짝 놀라 팔을 멈추고 한 손은 무료하게 외투 주머니에 집어 넣고,한 손으로 경순의 어깨를 잡고 자기 가슴에서 밀쳐내듯이 하여 이윽히 묵묵한 채 서 있었다. 조금 진정이 되자 경순이 자신도 깜짝 놀라 얼른 한 걸음 물러서려 했으나,그 순간 새로운 무서움이 확 치밀어 또다시 인섭의 외투 깃을 꽉 잡고 얼굴을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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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섭은 아무 의지의 판단을 기다릴 여가도 없이 무의식간에 경순의 등을 꼭 싸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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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인섭이가 경순이를 자기 팔 안에 껴안았음을 알고,경순이가 인섭의 팔 안에 안기었음을 인식하자 마치 무엇에 튕긴 것 같이 따로따로 떨어져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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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히 고개를 내려뜨리고 섰던 두 사람의 침묵을 인섭이가 먼저 깨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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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제야 경순이도 입을 열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는 또다시 침묵해 지고 말았다.
33
“경순씨,이것이 우리의 맹세를 깨트린 것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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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에 인섭이가 조용히 말했다. 경순이는 문득 불길한 예감이 떠오르며 가슴이 떨리기 시작하였다.
35
인섭이와 경순이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이 사람에게는 서로 범하지 말자고 맹세한 한 가지 계율이 있었다. 이 계율이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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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을 거행하기 전에는 서로 손이라도 잡지 말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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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을 어느 편이 먼저 제의했는지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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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같이 뜨겁고 계곡물같이 맑고 샛별같이 아름다운 그 사랑과 열정을 모두 결혼하는 날의 즐거운 희망으로 남겨두려는 생각에서 이러한 계율을 지은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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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한 처녀의 몸으로 단 한 사람을 사랑하고 이 사람과 결혼하여 그 밤에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참으로 정숙한 아내이다. 아무리 한 남자를 사랑하고 그 남자와 결혼한다 하더라도,결혼 전에 그 남자와 손끝 하나라도 마주침이 있어서는 비록 정숙한 아내라고는 할 수 있으나 순결한 사랑을 한, 순결한 처녀라고는 할 수 없다.”
40
라는 생각을 굳게 가진 경순이었음으로 그를 열렬히 사랑하는 인섭 역시 경순의 입에서 이러한 말을 듣기 전에 미리 이해하고 스스로 경순이의 생각을 존중하는 사이에 이러한 계율이 생겨나고 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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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이 경순이의 신조였으므로 가끔 순결한 처녀는 사랑도 하지 않다가 결혼하는 것이다,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이미 사랑은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 사랑을 순결한 사랑으로 기려 나가겠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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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그 밤에 더구나 하늘에 맑은 달님이 밝게 비치는 아래서 이 엄숙한 계율을 무의식간에 깨트리고 말았음에 두 사람이 다 같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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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 씨,모두 내 잘못입니다. 용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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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섭은 경순이가 너무 낙심하고 슬퍼할까 하여 위로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경순이는 온몸을 떨며 절망에 가슴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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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한 것에 그같이 슬퍼할 것이 없습니다. 비록 맹세는 하였지만 결코 경순 씨의 순결을 상하게 한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무의식간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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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섭은 더 말이 나오지 않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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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은 그만 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는 발을 구르고 그 산허리를 위로 아래로 구르고 싶을 만큼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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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마세요. 그만한 것에 그다지 슬퍼하면 어떻게 해요. 장차 가까운 앞날에는 경순 씨의 전체가 나의 것이 될 게 아닙니까? 경순 씨처럼 너무 그렇게 생각하심은 좀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요,모순입니다. 나를 이미 사랑하신다면 그까짓 것쯤이야 고의라 하더라도 하등 경순 씨의 순결을 더럽힌 것이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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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인섭은 그 자리에서 경순이를 위로하려고 바싹 다가서 경순이 어깨에 손을 얹었다.
54
경순은 인섭의 손을 뿌리치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인섭은 연달아 경순의 팔을 굳게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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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 같이 아름다운 달님을 마음껏 바라보며 즐거운 이야기나 하려고 이곳에 왔는데 그까짓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공연히 노할 것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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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은 인섭에게 잡힌 팔을 베어버리고 싶을 만치 안타까워 팔을 연해 뿌리쳤으나 인섭의 손아귀는 점점 힘 있게 잡고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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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 씨는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사랑한다면 그러실 것이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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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섭이는 달빛에 더욱 창백하여 떨고 있는 경순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어떻게 하더라도 어서 급히 그 맘을 풀어주려고 애를 썼다. 애를 쓰면 쓸수록 경순은 자꾸 물러서고,또 인섭이가 물러서서 타이르려면 그대로 달아날 것 같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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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 씨,그만하십시오. 이제 다시 맹세합니다. 네? 용서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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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섭이는 경순의 태도가 너무 완고하고 그 순결에 대하여 너무 결백하며 너무 신경질임에는 얼마만치 머리가 무겁지 않을 수 없었으나,이러한 순결에 대한 결백성이 모두 자기 한 사람을 위한 것임을 알기에 경순의 이러한 생각에 끝없이 감사하고 엄숙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인섭의 정열은 이 밤에 경순의 맘을 풀어놓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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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 씨,나는 맹세합니다. 당신 앞에 손을 들고 맹세합니다. 보세요, 이같이 맹세하지 않아요? 당신은 순결하고 고귀한 감정을 가지신 처녀입니다. 이 세상에 당신을 빼놓고는 한 사람도 순결한 처녀는 없습니다. 비록 이제 우리의 맹세를 깨트렸다고 하나 이것은 허물이 될 것이 없습니다. 당신의 맘 그것만이 제일입니다. 나는 내 앞에서 당신이 백만 번 다른 남자와 포옹을 하고 키스를 한다 해도 허물치 않고 순결한 나의 애인,정숙한 나의 아내라고 부르겠습니다. 맹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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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은 인섭의 이 말에 어안이 막히고 전신이 웅크러져 두 귀를 꽉 막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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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인섭은 뿌리치는 경순의 두 팔을 꼭 잡고 가슴에 힘껏 껴안으며 한사코 몸을 빼내려는 경순을 놓치지 않고 기어이 자기 가슴속을 다 말해 듣게 하고 말리라고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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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 씨,감사합니다. 당신의 그 맘은 하늘의 별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나는 맹세합니다. 꼭 들으세요. 비록 당신이 나를 버리고,어떠한 남자에게 시집을 가더라도,나는 당신을 순결한 나의 애인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나는 내 일생을 바쳐서라도 당신의 순결을 아니 순결한 그 맘만을 안고 살아가겠어요. 당신의 순결을 오직 당신의 맘에서 찾겠습니다. 당신의 육체는 어떠한 일이 있고,어떻게 남에게 짓밟혀도 나는 관계치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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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경순은 인섭을 떠밀며 죽을힘을 다하여 몸을 빼내려 했다. 인섭은 이윽히 경순을 안은 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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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나는 싫습니다. 놓으세요,놓아! 아! 무서워,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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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은 소리를 지르며 인섭의 가슴을 떠밀며 주먹으로 두들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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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당신은 왜 이러세요. 나를 버리시려나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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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밉나요? 왜 내 말을 들어주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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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섭은 경순을 놓았다. 경순은 한 걸음 비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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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발로 땅을 구르며 뛸 듯이 몸을 날려 산 아래를 보고 총알같이 달려갔다. 경순의 전신은 불같이 뜨겁고 머리는 혼란하여 회오리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자기 집 대문 안을 들어서서 자취끼 없이 건넌방인 자기 방으로 들어가 그대로 방바닥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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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순결한 처녀가 아니다. 내 몸은 망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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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각은 인섭에게 한번 손을 잡힌 것이 처녀로서의 모든 자랑을 유린당한 것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었으므로,인섭의 팔 안에 안기기까지 한 것을 생각하니 칼로써 자기 몸을 오려내고 싶도록 안타까웠다. 더구나,자기가 먼저 인섭에게 달려가 안긴 것이었고,인섭이가 떠밀려는 것을 무서워서 두 번째로 또 자기가 먼저 매달렸다,하는 것을 생각하니 그는 두 번 다시 인섭을 대할 면목이 없고,또 순결한 처녀로서 순결한 사랑을 하고 정숙한 그의 아내가 되려고 하였던 자기가 이제는,이제는 모두 망쳐지고 말았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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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워 울음소리가 목구멍에 꼬깃꼬깃 매어 올라 안방에서 어머니와 어머니의 친구들이 재미있게 이야기하는데 울음소리가 들릴까 하여 손바닥으로 입을 눌러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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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허리에 혼자 남긴 인섭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해에 처음 비치는 둥근달 아래서 즐겁게 앞날의 포부와 감상을 이야기하며,이 한해 동안에 많은 기쁨과 행복이 있으라는 축복도 주고받으려고 모처럼 남모르게 만나려던 것이 뜻밖에 이렇게 헤어지고 나니 얼마간은 몸도 움직이기가 싫었다. 경순의 그러한 태도는 가장 순결하고 엄숙한 것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이미 서로 굳게 사랑하는 사이인데 한 번 포옹에 그다지 심한 고통을 하는 것은 순결에 대한 감정이 너무 지나쳐 병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무서움에 자아를 잃어버리고 나에게 매달린 것이요,나 역시 무의식간에 그를 껴안은 데 불과하지 않았느냐. 이만한 것은 서로 웃고 두 번 다시 그런 부주의한 일은 없도록 경계하자고 하면 그만일 것이 아닌가. 비록 그가 결혼하기 전에는 손끝도 한번 마주침이 없고 서로 맘속으로만 사모하는 것이 가장 옳다고 믿으며,자기의 모든 것은 결혼식을 이룬 후 비로소 허락하려고 오직 그날만 바라고 고대하며 타오르는 정열을 죽을힘을 다해 참고 견디어 왔던 것이 무의식간에 깨트려지고 말았으니 안타깝기는 할 것이지만, 그 상대가 나인 이상 그같이 노하여 달아남은 너무나 심하지 않을까. 혹 또 그가 먼저 나에게 매달린 것을 괴로워함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도 그런 괴로움을 하지 말라고 억지로 그를 끌어안은 것이 아니었던가,하고 생각하니 두 다리에 맥이 풀리는 듯하여 겨우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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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섭은 지난 해 XXXX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그 고을 동명병원이라는 개인병원에서 자기의 연구도 할 겸 외과를 담당하여 있었다. 자기 집은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이었으므로 인섭이가 졸업하자 인섭의 도움이 없이는 생활하기가 곤란할 지경이었다. 더구나 그 아버지는 무능력자라 집안에서 놀기만 하는 사람이요,하나 누이는 시집가고 올해 중학교사 학년이 되는 동생뿐이었기에 그 가정의 책임은 장자인 인섭이가 혼자다 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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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방으로 들어간 인섭이는 이윽히 책상에 팔을 고이고 앉았다가 경순에게 편지를 썼다. 쓴 편지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다시 집을 나오기는 했으나 경순에게 시급히 전할 도리가 없었다. 한참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삼 전 우표를 사 붙여 우체통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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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이는 그 이튿날 점심 때 인섭의 편지를 받아 급히 자기 방으로 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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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얼른 그 편지를 뜯어볼 수가 없었다. 이미 자기는 인섭의 편지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되었던 것이었다. 인섭의 정숙한 아내가 되려고 털끝만 한 티끌도 없는 순결한 처녀로 행복한 결혼을 기다리던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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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무서웠다 할지라도 처녀의 몸으로 남의 남자 가슴에 가 매달리지 않았던가. 더구나 인섭은 남자였으나 그 맹세를 잊지 않고 나를 밀어내려 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다시 그에게 매달렸다. 나는 그이보다도 부정한 행동을 하였다. 내가 자꾸 매달려 그로 하여금 마지막에는 나를 무리로까지 안고 놓지 않게 하였다. 그는 얼마나 나를 원망할 것이냐. 나의 순결을 얼마나 의심하겠는가. 남자에게 먼저 달려든 여자! 아아 나는 어떡해. 나는 두 번 다시 그에게 대할 면목이 없구나. 아!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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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생각이 끝없이 북받쳐 올라 인섭의 편지를 열어보기가 무섭고 부끄러웠다. 자기가 인섭에게 먼저 매달린 것은 천하에 용납 못할 천한 행동이며 아주 천하고 음탕한 여자가 취하는 행동이라고까지 생각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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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손에 쥐었던 편지를 그대로 책상 서랍에 집어넣어 얼른 닫고 몸서리를 치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인섭에 대한 열정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그의 가슴은 인섭에 대한 부끄러움과 무서움과 후회로 꽉 차고 찢어질듯 안타까웠고,인섭에게 안겼던 것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나고 정신이 웅크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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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는 영원히 그를 대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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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부르짖었다. 그가 이렇게 인섭이를 영원히 대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들 때,비로소 얼마만치 진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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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인섭이는 늘 고민하며 경순의 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경순에게는 답이 없었다. 일주일이 지난 후 또다시 편지를 했다. 그러나 또 일주일이 지나도 답이 없었다. 그는 초조해졌다. 어떻게 하더라도 한 번만 만날 수 있기만 바라며,그런 기회를 얻기 위하여 자주 경순의 집 근처를 배회도 해 보았다. 모두가 헛수고였다. 그는 생각다 못하여 직접 경순의 부모에게 청혼을 해볼까도 생각하였었다. 거의 두어 달 동안이나 이렇게 지내는 동안에 문득 한 가지 의심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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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경순이가 절망하고 노여웠다 할지라도 그만한 까닭에 이다지 냉정할 리가 없다. 그의 부모가 나의 편지를 도중에서 없애버리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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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인섭은 이제는 편지를 보내는 것은 헛수고일 것이며 그동안 경순이가 얼마나 나의 소식을 기다렀을까,생각하면 잠시도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하루 급히 경순을 만나 자기의 맘속을 잘 타일러서 고민 중에 있는 그를 구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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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섭이가 있는 병원 원장의 딸 명주는 경순이와 여자고등학교를 함께 졸업한 동무인 것을 인섭이는 알고 있었다. 경성 XX전문에 다니는 명주가 요즘 춘기방학이라 집에 돌아와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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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명주에게 한번 부탁해서 경순이를 나와 만나도록 해달라고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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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생각이 문득 나자 인섭은 그날부터 명주가 병원에 나올 때를 기다려보았다. 그러나 명주는 좀처럼 병원에 나오지도 않고 병원과 잇대어 있는 원장의 사택에서도 서로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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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웬일인지 환자도 별로 없고 하여 인섭은 경순이를 만날 계교를 생각하며 어떻게 해야 명주에게 부탁을 해볼까,하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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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외과 진료실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인섭은 멍하니 창밖만 내다보며 하염없이 앉아 돌아다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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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원장의 어린 아들 석주가 명주와 함께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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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섭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앉아 귀찮은 듯이 대답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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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무게 있는 명주의 음성이 들리자 인섭은 깜짝 놀라 펄쩍 뛸 듯이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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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실례했습니다. 석주 너 어데 다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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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석주의 팔을 끌어 의자에 앉혔다.
114
하고 명주가 불만인 듯이 말했다. 인섭은 뜻하지 않은 이 좋은 기회에 가슴이 쿵덕 방아를 찧으며 기뻤다. 석주는 손바닥과 정강이를 조금 다쳤을 뿐이었으므로 얼른 소독을 한 후 요오드포름을 허처 붕대를 감았다. 석주는 그만 밖으로 뛰어나갔다. 명주도 뒤따라 나가려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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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인섭은 급히 불러 세우듯이 말을 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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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는 대답 대신 잠깐 미소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인섭은 어떻게 경순의 말을 꺼낼까 하고 궁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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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 씨는 이곳에 동무가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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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 얼굴은 잘 익은 능금같이 붉어지며 고개를 내려뜨렸다. 인섭은 더 말을 꺼낼 수가 없어 무료히 담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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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인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 노력으로 이렇게 말하고 말았고 명주는 잠깐 인섭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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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야 잘 모릅니다만 제 친구가 자꾸 칭찬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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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섭은 지금 명주 앞에서 바른말이 아무래도 나오지 않고 도리어 경순이와의 사이가 청백한 백지라고 변명이나 하듯 이렇게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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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이와는 여고를 함께 마쳤습니다만,걔는 저하고 성질이 잘 맞지 않아서 친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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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는 저윽히 안심이나 하듯 자기의 의시를 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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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경순이는 얌전하고 나는 말괄량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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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명주는 인섭을 또다시 쳐다보았다. 인섭은 가슴이 뜨끔해지며 등이 섬뜩하였다. 자기를 바라보는 명주의 시선,그것은 경순이가 그 어느 때 자기를 바라보던 광채 나고 뜨거운 그 눈동자 속에 있던 그 시선과 꼭 같은 것이라고 느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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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섭이는 얼마간 입이 꽉 막히고 말았다. 명주는 머뭇머뭇하며 자기 몸을 어떻게 가져야 옳을지를 잊어버린 것 같이 망설이다가 획 돌아서 문밖으로 달려갔다. 인섭은 멍하니 선 채 자기 역시 이 당장에 어떠한 표정을 가져야 좋을지를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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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달려 나기는 명주와 하마터면 이마받이를 할 뻔하여 폼을 피하며 천만뜻밖에 경순의 어머니가 들어왔다. 인섭은 가슴의 놀라움을 숨기려고 기침을 한번 크게 하고 담배에 불을 붙이며
143
“네. 저,이 손가락이 무단히 아파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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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인섭의 앞 의자에 와 앉으며 왼편 셋째손가락을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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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의 어머니에게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게 치하를 하여 돌려보낸 후 인섭은 머리를 부둥켜안고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명주에게 애원을 하든지 또는 간청을 하여 경순을 만날 기회를 지어보려고 생각하였던 것도 뜻하지 않은 명주의 묘한 태도로 말미암아 이상야릇한 결과를 짓고 말았던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혼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하필 그 장면에 경순의 어머니가 뛰어든 것은 인섭의 머리를 극도로 어지럽게 하였다. 경순이와 인섭의 사이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면 그래도 조금 나을 것이다. 만일 인섭이가 상상한 바와 마찬가지로 경순에게 가는 자기의 편지를 모조리 앞채여 읽고 있는 터이라면 자기는 얼굴을 들 수가 없을 만치 부끄러운 일이다. 아무리 명주와 청백한 사이라고 변명한들 명주의 달려 나가던 그 태도를 보고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그리고 만일 경순에게 이런 말이 들어간다면 그 결백한 성질에 얼마나 의심을 하며 괴로워할까,하는 것도 큰 두통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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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무래도 서로 만나야겠다. 지금은 오직 서로 만나 직접 이야기해보는 거 외에는 아무 좋은 수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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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생각을 하며 그는 불쾌한 그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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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은 인섭에게서 오는 편지를 한 장도 뜯어보지 않고 그대로 책상 서랍에 집어넣은 채 그 책상 가까이도 가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처음부터 오늘까지 인섭과의 사이를 전혀 알지도 못했고 편지도 그리 수상하게 보지 않았으므로 한 장도 손대지 않고 꼬박꼬박 경순에게 전했던 것이었다. 만일 그 부모가 인섭과의 사이를 알아챘다면 더 한층 인섭이 편지를 받들었을 것이었다. 신분이라든지 사람 된 품위리든지 또는 외모풍채라든지가 인섭이를 두고는 그 고을에서 경순의 짝될 청년이 그리 쉽게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자기네들 스스로가 은근히 인섭의 주위를 주의해오던 터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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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의 어머니가 병원에서 돌아와 그 남편과 경순이 듣는 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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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동명병원 외과 선생은 원장 딸 명주와 어떻게 됐는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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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말하자 그 남편은 태연은 하나 조금 실망의 빛을 띄웠다. 경순은 두 눈을 꿈쩍하며 하늘이 무너지는 듯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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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자기 귀를 의심하듯 재차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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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명주하고 아마 좋은가봐. 내가 병원에 가니까 둘이서 치료실에서 얼굴이 붉어져 정답게 이야기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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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비웃듯 대답하였다. 경순은 벌떡 일어나 자기 방으로 달려갔다. 방바닥에 힘껏 그 몸을 내던지려다가 우뚝하니 선 채 부르르 떨며 두 눈만 끔벅끔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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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섭 씨와 영원히 만나지 않으려고 결심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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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생각이 푹 솟아오르자 그는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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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나의 잘못이었다. 그날 밤을 새까맣게 지워버릴 수 없는 이상 나는 그를 대할 길이 없다. 모두가 악마의 저주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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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렇게 부르짖듯 하며 일어섰다. 그의 심사는 둘 곳이 없고 그 날 밤 이후 오늘까지 인섭이를 잊으려고 애쓰고 인섭에게 매달리던 그 두 팔과 인섭에게 안겼던 그 허리를 긁어내고 베어내지 못하여 하던 괴로움을 생각하면 그의 마음은 집 앓은 작은 새끼 새와도 같이 애가 끊어지는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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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생각이 들 때 그의 눈앞은 캄캄하였다. 다만 그 정월 대보름날을 인섭이와 결혼한 날이라 믿고 그리고 자기는 그대로 있다 죽으리라. 그러면 모든 괴로움은 사라질 것이며 순결한 처녀로서 정숙한 아내로서 일생을 마칠 수가 있다고 깊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인섭에게는 다시 얼굴을 들 수 없는 천한 행동을 보였으니 그는 자기의 순결을 의심할 것이다,하는 생각이 들며 다시 눈앞이 어두워지고 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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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난 후,그는 참다못해 인섭에게 편지를 쓰기로 결심하였다. 이미 몇 백 번 입안에서 되씹고 가슴을 서리며 생각해오던 것을 그대로 쓰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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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올리는 글월이오니 버리지 마시고 읽어주십시오. 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지나간 정월 십오 일을 나의 결혼 날이라고 믿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앞으로 살아 있는 동안 얼마만치 위로가 될까 합니다. 인섭 씨와 저는 결혼하였던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인섭 씨께서는 저를 용서하시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인섭 씨의 허락도 없이 제가 먼저 인섭 씨에게 몸을 던진 천한 몸입니다. 영원히 행복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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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펀지를 썼다. 그러나 한 번 고쳐 읽어보니 무슨 말인지 인섭이가 잘 알아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었다. 더 길게 많이 쓸 말이었으나 될 수 있는 대로 짧게 쓰려니까 이렇게 대중없는 편지가 되고 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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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고쳐 쓰려 했으나 그동안 자기 맘에 무슨 변동이 생기기 전에 뜯어 버릴 생각에 그대로 봉투에 넣어 하인을 시켜 우체통에 넣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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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섭은 오래간만에 이 편지를 받고 급히 봉투를 여는 손이 진정할 수 없게 떨렸다. 한 번 읽고 또 한 번 읽었다. 그러나 곧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경순이가 끝없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만은 똑똑히 알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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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가슴에는 경순이를 보면 일러주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았다. 그는 생각다 못하여 경순에게 한 번 만나게 해달라는 애원의 편지를 보낸 후 또 며칠이 지나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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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가 서울로 떠난 그 이튿날이다. 인섭은 최후 결심을 하고 자기와 가까운 간호부 옥순이를 불렀다. 옥순이는 겨우 열다섯 살 되는 소녀로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작년 봄부터 그 병원 간호부 견습으로 와 있는 귀여운 아이였다. 인섭은 평소부터 누이동생같이 귀애하는 터이라 자기를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으리라고 믿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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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오늘 저녁 일찍 먹고 우리 집에 잠깐 와주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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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시쯤 해서 아니, 꼭 정각 일곱 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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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섭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집 대문간에서 일곱 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옥순은 일곱 시가 채 못 되어 달려와 인섭에게 인사를 하였다. 인섭은 얼른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골목을 한참 걸어가다가 말없이 따라오는 옥순을 훌쩍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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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우편국 뒤에 있는 이 말씀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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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어둠 속에서 눈을 둥그렇게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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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 그 경순이 말이야. 너 수고스럽지만 지금 나하고 가서 나는 밖에서 기다릴 테니 너 혼자 들어가서 경순이더러 명주가 잠깐 놀러 오라더라고 하고,오지 않으려거든 기어이 만나자고 하더라고 말 좀 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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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오지 않으려거든 그러면 대문간까지라도 잠깐만 나가자고 해서 어떻게 하든지 나와 좀 만나게 해주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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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섭은 이런 수단으로 경순을 만나려는 것은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었으나 그에게는 전후 체면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옥순은 자못 놀랐는지 아무 대답이 없이 머뭇머뭇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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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 선생님은 서울 가셨는데 만일 가신 줄 알고 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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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순은 인섭의 뜻하지 않은 부탁에 일변 놀라며 이런 부탁을 받게 되는 것이 스스로 어색하여 얼굴을 붉히면서도 자기 위에 있는 즉 주인이나 다름없는 인섭에게 충실하려고 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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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도 관계없다. 좌우간 대문간까지만 나오도록 해다오,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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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섭의 간절하게 떨려 나오는 말을 듣자 옥순은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고 잠깐 무엇을 결심하듯 눈을 감았다 뜨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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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발길을 급히 돌렸다. 어느 사이엔지 우편국 뒷골목까지 갔다. 경순의 집 대문간에 켜져 있는 전등이 인섭의 눈에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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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옥순이, 미안하지만 속히 가소,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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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경순 언니를 어떻게 아십니까? 얼마 안 있어 영선이 오빠하고 결혼하는 것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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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순은 자기의 경애하는 주인 선생이 경순을 만나려고 애쓰는 모양이 안타깝기도 하고 또 지금 이같이 애태우는 인섭에게 알려주어야 자기가 인섭에게 대한 충실함에 잘못이 없음을 깨달았던 것이었으므로 요즘들은 경순의 얘기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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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섭은 자기 앞에 근심스런 얼굴로 서 있는 옥순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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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 언니가 영선이 오빠에게 시집간답니다. 선생님 모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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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순은 인섭이가 경순의 결혼을 모르고 공연히 헛수고할까 봐 염려가 되어 알려준 뜻을 인섭이가 얼른 알아듣지 못함이 이상하였다.
202
“누가 결혼을 해? 너 어데서 들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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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저께 혼수가 갔는데요. 영선이는 우리 집 곁에 있어요. 영선이 오빠는 김영준이라는 사람인데 금융조합에 다닌답니다. 혼수가음을 받을 때 저의 어머니도 갔다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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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섭은 태연하였으나 그의 두 입술은 가볍게 경련을 일으키며 눈물이 핑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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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섭은 멍하니 경순의 집 대문간 전등만 바라보았다. 옥순은 그제야 인섭의 가슴속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라도 인섭을 위로해주고 싶었으나 무어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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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나무처럼 우뚝 선 채 어깨만 들먹거리는 인섭의 얼굴을 쳐다보며 보드라운 애정을 가득 실은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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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섭은 옥순의 어깨를 두 손으로 걸어 잡아 와락 자기 가슴에 꼭 껴안고 옥순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얹고 한숨과 느껴짐을 참으려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몸은 몽둥이를 얻어맞은 듯 비틀거리며 그대로 혼자 따로 설기력이 없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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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1936년 8월 / 193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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