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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문학(現代文學)의 정신적(精神的) 기축(基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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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3
임화
1
現代文學[현대문학]의 精神的[정신적] 基軸[기축]
2
── 主體[주체]의 再建[재건]과 現實[현실]의 意義[의의] ──
 
 
3
主體[주체]의 문제가 온갖 과제를 제쳐 놓고 우리의 관심 초점되는 것은 前日[전일]에도 말한 바와 같이 오늘날의 문학 정신이 比類[비류] 없는 불안 가운데 방황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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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主體性[주체성]이란 무엇인가 하면 一言[일언]하여 문학하는 작가의 자기에 관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어째서 문학을 하며 작가는 창작한다는 사실 속에 과연 어떠한 의의를 발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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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련의 물음이 不絶[부절]하게 작가의 심리 속으로 육박할때 문학은 비로소 주체의 문제를 焦眉[초미]의 日程[일정]으로 택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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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문학은 본시 개인의 각도에서 세계를 보는 관념상태라든가 前日[전일]의 작가들이 자기의 문제를 떠나 문학을 생각했기 때문에 주체를 성찰한다든가 하는 것은 상당히 무의미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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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미의 주체성이라든가 주체에 대한 반성은 모든 시대의 문학에 편재했던 것이라 말할 수가 있다. 문학은 자기를 표현하므로서 세계를 인식하는 예술이었고, 작품은 제 구조와 더불어 항상 제 정신을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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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 갖는 정신이란 것이 작가에 있어선 자기의 문학하는 이유일뿐 아니라 사는 의의라든가 생의 가치 그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이 主體[주체]의 角度[각도]에 反省[반성]될 때는 반드시 그 시대의 문학 정신이 좁고 얕은 황무지를 低迷[저미]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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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일개의 작가적 현실에서가 아니라 넓은 문학적 현실 그것에 대한 하나의 시대적, 역사적 반성으로서 주체의 성질이 물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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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작가의 주체에 대한 반성은 이 시대의 인간이 존재하고 살아가는 방식과 의의에 관한 근본 省察[성찰]에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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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입장에서 주체에 대한 반성을 생각할때 우리는 인간이 외부를 향하여 작용하는 힘이 약해질 경우, 바꾸어 말하면 외계의 힘이 우리의 능력으로 좀처럼 어찌되지 않을때 인간은 자기 내부 가운데 褄息[처식]할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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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대외적 활동으로부터 대내적 성찰에의 귀환! 따라서 우리가 주체의 본성을 묻는 근거는 단순히 경향문학의 존립이 위기 하에 있다는 간단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문학 정신이 빠져있는 함정 가운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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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은 우리가 아직도 그 大氣[대기] 가운데서 호흡하고 있는 근대문학 가운데 문학 정신이 걸어 온 과정을 보면 영롱한 영상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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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19세기 문학의 巨匠[거장]들은 지성의 승리를 확신하여 콜룸부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듯 근대문학의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자기에 관한 의식은 외계를 정복하는 능력이 된 것이다. 그러나 前世紀末[전세기말]로부터 現世紀初[현세기초]에 이르는 사이에 다수한 작가들은 지성의 만능을 믿을 수 없었고, 자기에 관한 의식은 벌써 외계를 정복할 힘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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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의 문명이 낳은 비극 속에서 작가들이 지성의 패배를 의식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 속에서 世紀末[세기말]의 페시미즘이나 데카당스 예술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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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지성은 작가의 과중한 부담이 되었고, 작가들은 자기 자신의 의지의 능력이란 것을 시험하려 하였다. 의지만이 우리가 살아 있는 확실한 표적이고, 의지만이 지성으로서 패배한 문학 정신을 구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의지에다 今世紀初[금세기초]의 철학자나 시인이 얼마나 큰 창조적 의의를 부여하였는가를 아직도 기억할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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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인간의 博物誌[박물지]를 쓴다든가 풍속의 역사를 읽는다든가 하는 廣場[광장]에서 문학하는 기점은 비로소 작가의 자기 가운데로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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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20세기는 前世紀[전세기]가 항상 傾倒[경도]해 오던 ‘社會[사회]’로부터 ‘生[생]’이란 곳으로 문학하는 중점을 옮겼다. 다시 말하면 사회를 알아내는 데서 愉悅[유열]을 찾는 대신 의지를 가지고 사는 가치를 찾고 증명할려는 데 의의를 찾으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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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산다는 것은 意志[의지]가 부단히 무엇인가를 실현해 가는 과정이 아닐까? 意志[의지]하는 정열이란 언제나 대상을 정복하고야 말려는 갈망의 열광이라 할 수 있다. 의지는 의지의 실현으로서만 비로소 충족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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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의지는 일찌기 지성을 때려 눕힌 세계라는 ‘마몬[mammon]’을 향하여 고함을 치고 뛰어든 것이다. 그러므로 의지의 문학은 지성의 문학을 격파한 ‘마몬’에 대한 인간의 분노에 타는 보복이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지성을 통하여 파악할 수 없는 세계를 의지의 힘을 가지고 정복하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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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의지의 정신이 문학의 방방곡곡에서 지성을 소탕하려던 심사를 우리는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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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아직 지성의 잔재를 용인한다는 것은 이미 無用[무용]에 歸[귀]한 연장을 가지고 재생을 꾀하는 것이고, 그 기도가 패퇴에 끝날 것은 자명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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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現世紀[현세기]에 생존한 대개의 지적 작가들이 19세기적 풍모를 벗지 못한데 비하여 의지적, 야성적인 작가들이 모두 현대적인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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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지드와 니체, 헉슬리와 로렌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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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찌기 신의 손아귀로부터 세계를 탈환한 위대한 지성이, 다시 말하면 지성의 힘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발밑에 정복 당한 세계가 다시 지성을 이겨 넘겼다는 데는 세계 그것의 변화를 생각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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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어린애를 지배하던 어른이 노쇠하여 다시 그 어른된 아이에게 지배되는 것처럼 세계의 성장에 비하여 지성은 노쇠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실상 노쇠한 지성과 장성한 세계와의 힘 관계, 즉 위치의 전도와 역전에 있다. 즉 노쇠한 지성은 장성한 세계의 위력아래 敗散[패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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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일찌기 지성의 힘으로 從順[종순]히 파악된 세계는 오늘날의 세계의 미성년시대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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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대하여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란 것을 역사적으로 繼起[계기]하는 물건으로 고쳐 이해하지 않고는 이 물음에 충분히 대답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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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의미에서 보면 지성이 만능을 자랑하던 시대에 현세계는 기어다니는 어린애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아진 세계는 결코 한번 난채 영구히 죽지 않고 자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나 생명 있는 모든 유기체와 같이 나서 자라서 늙어서 죽는 것이다. 또한 낡은 세계는 아직 장년기의 동물처럼 生殖[생식] 작용을 영위하는 것으로 새 세계는 낡은 세계가 죽기 전에 이미 생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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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역사 과정에도 세대 교체의 긴 과도기가 있는 것으로 그동안 젊은 새 세계와 늙은 세계가 한 영역 내에 共棲[공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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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 과도기는 구세계와 신세계의 충돌이 일어나고 역사의 영역은 한 혼란상을 呈[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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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째서 지성은 패배하였는가? 우리가 지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상 19세기적 세계가 意志[의지]한 바를 知識化[지식화] 한 것에 불과한 때문이다. 그것은 19세기적 세계, 바꾸어 말하면 市民社會[시민사회]의 세계관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버이들의 도덕률이 젊은 자녀들의 자유연애를 제어할 수 없는 것처럼 시민사회의 세계관은 그 자녀인 연소한 사람들의 행위를 統禦[통어]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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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그것은 새 세계의 지성에 의해서만 달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意志[의지]하는 정신은 지성의 이 역사적 한계를 의식치 못했고, 낡은 지성의 패배는 지성 일반의 廢棄[폐기]에서가 아니라 새 지성의 형성으로 회복되는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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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지성이란 개개인에게서 의지되는 것을 제한된 역사적 조건하에서 보편화 한 데 불과한 것이다. 의지는 지성 가운데 일반화되고 개인은 지성 가운데서 사회화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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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새로운 지성을 자각하지 못한 의지는 일반적 성격을 얻지 못하고 분산된 개개의 의식으로서 고립화 하고만 것이다. 그러나 전술과 같이 새 세계는 일반적으로 구세계와 대립하고 모든 개인은 그 가운데 포섭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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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의지의 정열은 불행히 이 일반화를 피하여 孤立[고립]함으로써 혼란한 세계를 정복하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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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의지의 정열은 지성을 대신하여 세계를 잡으려 분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성과 같이 새 세계를 잡을 능력은 없었다. 결국 의지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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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의 비극이란 실로 모든 합리주의(知的[지적]!)를 싫어한 自意識[자의식]의 당연한 운명이었고 고아가 된 개인의 어쩔 수 없는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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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외부 현실의 추구로부터 ‘自己[자기]’의 탐구로 돌아온 현대문학이 거대한 절망의 심연을 헤매는 연유가 있다. 그러나 현대적 불안은 결코 보들레르가 도달한 지옥의 단순한 번복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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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꽃」의 세계가 19세기적 지성이 패퇴한 직후, 인간 정신 앞에 전개된 첫번째 지옥의 황야였다면 현대적 불안은 의지의 비극으로 말미암아 더 한층 깊이 패인 절망의 심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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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死刑囚[사형수]인 동시에 사형 집행인’인 지옥 가운데서 보들레르는 ‘悔恨[회한]’의 정열을 가지고 희생하였으나 현대적 심연 속엔 ‘悔恨[회한]’의 정열까지도 용납될 여지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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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비극은 가중되어 버렸다.
 
 
43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보들레르 다음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름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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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가 인간의 혼 가운데 파진 자기 분열의 과정을 완성하였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실로 가중된 비극을 계시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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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회한의 정열을 노래할 수는 있다. 그러나 비탄의 鳴咽[명열]도 죽엄의 공포도 이젠 노래할 수 없는 심리, 심연이란 실로 죽기 벌써 전에 죽어 버린 인간들이 알 수 없는 旋風[선풍] 속을 방황하는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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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마 절망한 인간의 의식계가 아니라 산 망령의 의식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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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두려운 상태를 그려낼 수 있는 힘이 아직도 작가에게 부여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 아닐 수가 없다. 실로 기적에 대한 경탄의 생각없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을 수는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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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는 무엇을 증명하고 있는가? 우리는 다시 意志[의지]하는 자기의 문제로 돌아간다.
 
49
자기에 관한 意識[의식]이란 영원한 비극의 상징이냐 하면 그렇지 않았다.
 
50
일찌기 자기에 대한 의식이 한개 희열이었고 제 가치에 관한 자각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개성에 눈뜬다는 것이 인간의 굳셈의 선언인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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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있어 개인이란 것은 헥토르(호머의 「일리아드」 詩[시]에 등장하는 트로이의 영웅)의 이름처럼 轟轟[굉굉]히 울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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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의 시대에 와선 자기를 의식한다는 것은 너무나 쓰라린 일이 되어 버렸다.
 
53
自己[자기]! 個性[개성]! 그것은 벌써 인간사회에 있어 가장 무력한 존재의 칭호다.
 
54
요컨대 자기를 의식한다는 것은 제 굳셈과 힘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 제 약함과 무력에 대한 의식이 된 것이다.
 
55
無力[무력]에 대한 意識[의식]! 그것은 절망의 死滅[사멸]에 대한 공포다. 우리들은 도저히 공포란 상태를 오래 참을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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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때 인간은 공포로부터 탈출할려는 본능의 최후의 시험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라스콜리니코프(도스토예프스키의 「罪[죄]와 罰[벌]」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를 생각한다. 제 약함과 무력에 대한 의식을 사멸의 의식으로 절망하고 싶지 않았던 총명한 한 청년이 무고한 빛쟁이 노파를 죽여 본다는 것은 결코 유희가 아니다. 더구나 단순한 범죄는 아니다. 나폴레옹이 세계를 정복키 위하여 무수한 인명을 죽일 수 있다면 한 사람의 무명 청년이 제 무력을 부정하기 위하여 어째서 버러지 같은 노파 하나쯤을 실험 대상에 올려 놓을 수 없느냐? 라스콜리니코프의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간 이상념의 섬광은 상식을 가지고 律[율]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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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연 버러지와 같은 한 노파를 찍어 죽인 팔의 선혈을 바라보며 그는 제 강함을 의식하였을까? 「罪[죄]와 罰[벌]」 한권은 실로 이 시험이 헛됨에 대한 절망의 書[서]라 할 수 있다. 버러지와 같은 한 노파가 죽어간 외에 이 지상엔 라스콜리니코프의 굳셈을 반증할 변화는 一毫[일호]도 없었다. 이 결과의 공허함에 대한 그의 공포는 그를 일층 깊은 심연 속으로 밀어넣었다. 그는 자기에게 있어 전생애와 전세계를 賭[도]한 운명적 시험을 통하여 그는 다시 한번 제 무력에 대한 의식을 강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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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賭[도]하여 제 절망의 반증을 얻는다는 것은 진실로 두려운 시험이 아닐 수가 없었다.
 
59
이 장면은 실로 현대인의 자의식이 체험한 절망적 비극의 거대한 심볼이다. 보들레르적 자기 분열은 허망의 공포가 된 것이다.
 
60
그러므로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니아의 인도로 신의 나라의 문을 두드려 본다는 것은 하나의 공허한 소설적 픽션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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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자기의 약함에 대한 의식이 아직 죽엄의 절망이 아닌 것을 시험할 장소는 어딘가? 그것은 보들레르적 悔恨[회한]의 세계도 아니며 도스토예프스키적 신의 천국도 아니다. 오직 ‘悔恨[회한]’에 의해서도 ‘신’에 의해서도 구원되지 못한 비극적 자기가 서 있는 세계, 우리를 무력하고 약하게 만든 그 장소가 있을 뿐이다.
 
 
62
그것은 결코 버러지와 같은 한 노파로 대표될 만큼 초라한 세계는 아니었다. 우리의 의지는 그 침통한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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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를 죽인 피묻은 팔이 걷잡을 수 없는 허망에 떨린 것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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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세계 앞엔 낡은 지성도 새 의지도 한가지로 무력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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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새 세계를 정복할 인간의 능력은 무엇으로 대표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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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所與[소여]한 세계를 정복하는데 인간의 어떤 능력이 가장 성공적이었는가를 반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67
예를 들면 중세로부터 탄생해 나와 장성한 市民社會[시민사회]를 정복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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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것이 지성이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 그 지성은 어떤 것이었던가? 그것은 중세기를 때려 엎고 새 세계를 건립하려는 근대인의 의지, 그것의 일반화 된 체계였다. 의지가 지성으로서 일반화 되기 전에 광대한 세계를 한아름에 파악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근대인은 제 의지를 어떻게 일반화 하였는가 하면, 그들은 세계를 알므로써 단순한 의지를 세계를 정복할 지성으로 고친 것이다.
 
69
‘아는 것은 힘이다!’ 意志[의지]하는 것은 단순히 ‘힘’의 端初[단초] 前題[전제]에 불과하였다.
 
70
그러므로 意志[의지]는 인간의 손이고 지성은 그물(網[망])이라 할 수가 있다. 그물을 만드는 것도 인간의 힘이고 그물질을 하는 것도 인간의 힘이나, 어류를 잡는 것은 결국 그물이다. 손으로는 결코 그물이 잡아내는 고기를 잡을 수는 없다.
 
71
그러므로 지성의 패배나 의지의 비극은 결국 새 세계를 잡을 지성의 확립으로서만 구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하면 새 세계를 파악키 위해서는 새 지성이 필요한 것이었다.
 
72
그러면 새 지성의 體系[체계]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일부러 탐색의 모험을 하지 않고라도 새 세계의 젊은 의지가 만들어 낸 지성의 체계를 찾아낼 수가 있었다. 우리는 많은 지혜로운 작가들이 이 지성을 가지고 새 세계를 파악하려던 사실을 숙지하고 있다. 어쩌면 현재 主體[주체]의 행방을 논하는 우리들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었을 것인지도 알 수 없다.
 
73
그러나 이곳에도 痛切[통절]한 비극의 鳴咽[명열]이 울렸다. 그들은 정당하고 새 지성의 힘으로 새 세계를 파악하려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不意[불의]의 패배에 떨었다.
 
74
이것은 대체 어떠한 비극일까? 많은 사람들은 이 비극을 역시 지성을 가지고 세계를 파악하려는 사람들의 일반적 비극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한번 패배한 지성이란 것을 다시 들고 나온 이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그러나 과연 새 지성은 낡은 지성과 같이 그것이 지성이었음으로 패배하였는가? 우리는 여기에 별다른 해답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 지성은 결코 그것이 지성적이기 때문에 패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아직도 단순한 의지의 인간이었던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낡은 지성의 패배와는 하등의 공통성이 없을 뿐더러, 낡은 의지의 비극과도 공통되지 않는다.
 
75
낡은 의지는 온전히 자기의 힘으로 세계를 시험하려 하였으나, 새 의지는 세계를 알므로써 세계를 움직이고 자기를 굳세게 하려 하였었다.
 
76
그러므로 새 의지의 비극은 새 세계를 아직도 충분히 알아내지 못한 채 있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새 지성의 체계 가운데로 제 意志[의지]를 충분히 일반화 시키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극을 통하여 知性[지성]과 意志[의지]의 괴리가 나타난 것이다.
 
77
바꿔 말하면 일종의 자기 분열, 그러면 이 새로운 의미의 내적 분열은 보들레르의 ‘나’와 ‘나’를 벌하는 자의 分裂[분열]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78
자기 告發[고발]을 주장하는 一論者[일논자]가 이 兩個[양개]의 자기 분열을 작가의 심리적 類似性[유사성]에서 파악하려 한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79
제 자신 가운데 제 자신의 대립자를 발견하고 그것 때문에 고통의 처벌을 받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80
그러나 우리들을 괴롭히는 것은 보들레르를 괴롭힌 것처럼 지성의 패퇴에서 오는 단순한 무력감이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극복할 새 지성과 용기의 형성을 현실 가운데 보면서도 그것을 자기의 연장으로 조작하지 못하는 憤懣[분만]이다. 다시 말하면 라브린의 말과 같이 ‘진실로 개성적인 자기 주장은 오직 超個人的[초개인적]인 의지와 가치 속에만’ 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조그만 제 ‘自己[자기]’라는 곳을 탈출할 수 없는 데서 비극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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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진정한 자기의 전개 앞에 ‘저’라는 것이 온전한 장애물로 화한 것이다.
 
82
그러므로 다시 라브린의 말을 빌면 ‘저’란 명목하의 모든 자기 주장과 같이 결국은 자기 붕괴의 危機下[위기하]에 적당한 것이다.
 
83
이곳에서 주체론은 우리의 당면 과제로 등장한 것이며, 또한 이점에서 보들레르와 우리는 訣別[결별]할 뿐 아니라, 告發文學論[고발문학론]과 우리는 손길을 나누는 것이다.
 
84
보들레르는 조금도 자기를 초월하고 자기를 새 세계의 일반적 자기로 轉化[전화]시킴으로서 내적 분열을 超克[초극]할려고 생각한 사람은 아니다.
 
85
보들레르는 이것을 알 능력이 없었고 또한 시대의 한계가 그것을 허락치 않았다. 그러므로 보들레르는 내적 상극의 슬픈 향락자이었다.
 
86
그러나 고발의 문학론자는 우리와 동시대인이다. 자기 자신 속의 악마가 결국은 超自己[초자기]의 완성으로만 극복되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기의 악마를 그는 이것을 ‘유다’란 기독교적 칭호로 형용한다! 용기를 가지고 증오하며 告發文學論[고발문학론]은 제 악마의 고발자가 된다.
 
87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포즈의 차이로서 과연 양자를 정신적으로 구별할 수 있을까! 이곳에 우리의 문제의 초점이 있다.
 
 
88
보들레르와 告發文學論者[고발문학론자]를 구별하는 제일 큰 標幟[표치]는 前者[전자]가 제 악마의 정체를 명백히 몰랐던 대신 後者[후자]는 제 ‘유다’를 소시민이라고 적발한 데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양자가 다같이 제 악마와 ‘유다’를 제 자신 가운데서 찾으려 하는 데서는 죽엄도 구별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주체의 문제를 자기 분열과 심리 상극의 범위 안에서 파악하는 데선 양자를 구별할 수가 없다.
 
89
이점에서 즉 主體問題[주체문제]를 自己分裂[자기분열], 內的[내적] 相剋[상극]의 측면에서 파악치 않었다고 告發文學論者[고발문학론자]는 우리들 약간의 論者[논자]를 비난하였는데 이 비난은 우리에게 있어 아직도 하나의 榮擧[영거]라고 생각한다.
 
90
왜냐하면 主體論[주체론]의 심리적 파악은 그 극복의 방법을 制約[제약]함으로서다.
 
91
그들은 자기 분열을 온전히 내부의 심리적 자기 투쟁으로만 해결되리라고 믿는 때문이다.
 
92
보들레르의 한계는 실상 ‘유다’를 악마라고 부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분열을 內心[내심]의 相剋[상극]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내심의 격투로서 해결하는데 있었다.
 
93
자기 고발이 어떻게 하여 보들레르의 亞流[아류]임을 면할 것인가? 자기 내부에 있는 ‘유다’, 소위 소시민을 낱낱이 적발하여 公衆[공중]의 면전에 고발함으로서인가? 그러면 자기 고발문학의 예술적 가치는 역시 문학적 정열의 表皮[표피]하에 숨은 모든 추악상을 공개하는 데 있을 것이다.
 
94
그러나 이것만으로서 보들레르를 이겨낼 수는 없는 것이다. 보들레르의 예술적 가치도 비록 悔恨[회한]의 정열을 가지고 하였을망정 악마에게 유혹당한 제 추악한 심연을 상식의 의상을 찢고 開示[개시]한데 있는 것이다.
 
95
그러므로 자기 분열이란 것을 심리의 決裂[결렬]이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실상은 분열된 세계, 과도적 二重[이중] 세계의 심리적 반영으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 가운데 있는 제 敵[적]은 현실 가운데 있는 인간의 敵[적]의 일부분임을 이해하는게 결정적 의의를 갖는다.
 
96
따라서 자기의 ‘유다’에 대한 항쟁, 자기 내부의 소시민에 대한 싸움은 실상 자기 가운데 남아있는 낡은 세계와 낡은 문화 가치와 그 파편에 대한 항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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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우리의 자기 相克[상극]은 광범한 세계에 있어서 낡은 지성과 새 지성, 낡은 현실과 새 현실의 상극 그것이다.
 
98
意識[의식]이란 의식된 존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자기 분열의 극복은 결코 내부의 상극, 양심의 가책, 고발의 쾌감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분열된 자기에 의한 자기 분열에의 항쟁 그것은 한개의 循還[순환] 논리다. 자기 분열의 극복이 통일된 자기의 완성이라면 이 힘은 새 세계의 지성으로 자기 내부를 채우는 데 있다.
 
99
그러므로 우리는 베이컨과 같이 ‘아는 것은 힘’이란 명제를 다시 한번 강조해야 한다. 현실을 안다는 것은 결코 모르는 자기를 고발함으로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행위함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행위는 또한 단순한 관찰이 아니다. 현실을 지배하느냐? 현실에게 지배되느냐를 결정하는 실천, 이 실천의 과정을 통하여 사람은 현실에 적합한 견해를 살리고 背馳[배치]되는 견해를 죽이어 또한 현실에 背馳[배치]되는 견해를 대신하여 아직 모르는 현실의 적합한 견해가 새로 형성되는 것이다.
 
100
이것이 실천을 통한 현실과 인간과의 상호 관계다. 그러므로 未完[미완]의 주체에 있어서 현실은 항상 그릇된 의식이 패배하며 옳은 의식은 살아, 차차로 현실을 지배할 완전한 의식(적합한 의식만이 현실을 지배한다 ── 必然[필연] = 自由[자유])을 형성해 가는 試鍊[시련]의 장소다.
 
101
우리는 이 행위와 실천과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선 시련의 세계로서의 현실의 가치를 재인식하고 高調[고조]해야 한다.
 
102
문학에 있어 이 방법은 제 주관에 구애되지 않고 현실을 탐구하여 현실 그것의 구조로 작품을 構造[구조]하고 現實[현실]에서 체험당하는 작가 주체의 시련의 정열로 작품의 정신을 삼는 그러한 방법이다.
 
103
우리는 한사람의 주인공이 어떠한 인물일지라도 작가가 미리 그 인물의 운명을 부여하지 않고 그 인물이 부단히 체험하는 현실과의 상관 속에 제 운명이 만들어지는 그런 작품을 인간적, 예술적 리얼리티를 가진 작품이라 한다.
 
104
리얼리티란 결코 하나의 죽은 언어가 아니다. 개인과 현실과의 항쟁의 진실성! 고조된 열도 속에 만들어지는 인간적 운명의 박진성, 그것을 리얼리티라 부른다.
 
105
예를 들면 우리가 우리와 같은 인물을 가정하여 그 인물이 오늘의 현실 가운데 무엇을 체험하고 그 체험은 그 인물의 성격을 어떻게 개조하며 전체로서 그의 운명은 어떻게 결정되는가를 표시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주체를 문학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일뿐 아니라 현실을 주체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이다.
 
106
왜냐하면 그런 작품은 우리의 生[생]의 과정 그것의 반영이며 주인공의 정열은 우리 자신의 정열의 再現[재현]이기 때문이다.
 
107
그러므로 나는 성격의 입장에서 현실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가운데서 성격의 발전을 논술한 허크네스에의 書翰[서한]의 거대한 의의를 강조한 것이다.
 
108
그러나 현실을 단순히 묘사의 대상으로 밖엔 이해치 못하는 사람에겐 이 서한은 영원한 禁斷[금단]의 書[서]일 것이다.
 
109
묘사하는 것과 사는 것을 분리하고 현실을 죽은 묘사의 一對象[일대상]으로밖엔 보지 못하는 俗見[속견]은 시급히 타파되어야 한다.
 
110
현실은 주체의 성질을 분석하는 시금석이고 성격의 운명을 결정하는 客體[객체]다.
 
111
현실과의 상관에서 주체가 시련된다는 것은 우리가 시험을 통하여 운명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112
현실은 절대로 묘사의 對象[대상] 以上[이상]이다. 우리는 현실과의 갈등에서 운명을 만들기 위하여 문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生[생]의 標的[표적]으로 긍정한다.
 
 
113
(193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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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화(林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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