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온달(溫達)과 평강(平康)공주의 전설적 로맨스가 서린 아차산이 서쪽을 병풍처럼 둘러 서울시와 경계로 접하고 수도권의 젖줄인 한강을 남쪽 경계로 그리고 동쪽으로는 왕숙천을 남양주시와 접한 구리시는 1986년 읍에서 시로 승격 당시 인구 9만2천명에 전국에 제일작은 30.10㎢ 면적의 도시로 출발했다.
14년이 지난 오늘에는 아파트 숲을 이룬 인구 17만의 중견도시로 성장하면서 서울 동북부 3백만을 위한 구리농수산물도매시장의 개설 그리고 LG백화점 등의 개장으로 생동감 있는 유통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한반도 역사의 중심 무대였던 한강유역에 속해 있으면서 전략적 요충인 아차산을 끼고 있어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의 패권다툼이 치열했던 곳으로 백제시대에는 수도 한성에 포함되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양주 또는 남경(南京)의 풍양현(豊壤懸)에 속해 있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서 한양에 도읍을 정하자 양주가 변방으로 밀려나면서 양주의 일부인 구지면(龜旨面)으로, 그러다가 일제시대인 1914년 구지면과 망우면, 노원면, 진관면의 일부를 병합하여 9개의 리(里)로 재편되면서 구리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고 그후 1986년 시로 승격되어 오늘의 구리시가 되었다.
한강과 아차산이 어우러지고 동쪽으로는 왕숙천이 흘러 비옥한 토지의 구리시는 서울 동북부 교통의 요지로 경춘가도와 중부고속도로의 관문으로 많은 물산이 집적하여 구리농수산물 도매시장의 개설을 보기에 이르렀다. 또한 조선시대 진상품인 먹골배의 산지였던 옛날의 구지면 묵동리(지금의 서울 중랑구 묵동)가 도시개발로 배밭이 없어지고 그 산지가 구리지역으로 이전됨에 따라 이제 먹골배는 구리시의 특산품이 되고 있다. 특히 1994년부터는 아차산 일대에서 발굴된 고구려 보루성 유물 유적이 지금까지 한반도 전체에서 발굴된 양보다 많은 1,500여점이 출토되어 구리시는 새삼 고구려 역사의 유적지로 학계나 시민들로부터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다.
삼한 BC 3세기 마한에 속하였다.
백제 BC 18년 지리적으로 백제의 서울 하북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구려 396 광개토왕 6년에 고구려의 백제 정벌로 아차산이 함락됨. 475 장수왕 63년에 장수왕의 남진으로 고구려 영토 확정, 당시 북한산군(지금의 서울지역) 관내인 골의노현에 속했을 것을 보인다.
백제 551 성왕 29년에 나·제 연합군이 한강유역을 공격하여 하류지역은 다시 백제의 땅이 되었다.
신라 553 진흥왕 14년 신라가 한강 하류지역을 공격하여 신라의 땅이되었다.
통일신라 757 경덕왕 16년에 지금의 서울지역은 한양군이었고 남양주시 진접·진건일대는 황양으로 개칭되었다.
후삼국 898 양주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났다.
고려 1308 충선왕 즉위 후 남경은 한양부로 격하되었다.
조선 1394 태조3년에 지금의 서울지역에 도읍이 들면서 한성부라 개칭하고 양주의 치소를 아차산 남쪽 대동리로 옮겼다. 지양주사로 강등되었다. 1530 중종 25년에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구지(九旨,龜旨)"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였다.구지면에 속한 리(里)로 사노리, 인장리, 수택리, 백교리, 토막리, 동창리, 이문리, 평촌리, 아차동, 우미천리 등 10개리가 있었다.
근·현대 1914 구지면의 10개 리와 망우리면의 15개리 그리고 노원면, 미원면, 미음면, 진관면, 별내면의 일부를 병합하여 구지의 구(九)자와 망우리의 리(里)자를 따서 구리면이라 하였다. 1963 묵동, 중하, 상봉, 신내, 망우동 5개리가 분리되어 서울시에 편입되었다. 양주군 구리면은 인창리, 사노리, 교문리, 수택리, 토평리, 아천리, 갈매리 등 7개 리로 편제되었다. 1973 구리읍으로 승격되어 양주군에 그대로 편제되었다. 1980 양주군에서 분리되어 남양주군에 소속되었다. 1986 구리읍이 구리시로 승격되었다. 1996 행정동의 수택동이 수택1동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수평동이 수택2동과 수택3동으로 분동되어 행정 8개동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