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7 ~ 1604] 1577년(선조 10년) 윤희굉(尹希宏)의 아들로 태어나 숙부인 윤희정(尹希定)에게 입양되어 성장기를 보낸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이술(李述), 호는 파담(坡潭)이다. 성품이 온화하고 청렴했으며
사륙변려문을 잘 지은 문신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이란 중국 육조(六朝) 시대에서 당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행한 한문 문체의 하나로, 주로 4자와 6자의 구(句)를 기본으로 하여 대구(對句)를 쓰며, 전고(典故)를 교묘하게 배열하는 화려한 문체를 말한다. 저자가 사륙변려문을 잘 구사해서 그런지, 『달천몽유록』을 읽다보면 중국의 고전에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 춘추전국시대의 이름난 제후들 간의 쟁투, 반란 등과 연관된 각종 고사 성어와 전고(典故) 등이 유독 많이 인용되고 있다.
윤계선은 1597년(선조 3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급제한 뒤 관직의 길로 들어섰다. 성균관 전적(典籍 : 정6품 관직), 예조좌랑(禮曹佐郞 : 정6품 관직), 병조정랑(兵曹正郞 : 정5품 관직), 헌납(獻納) 등을 지냈다. 이어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경연청검토관(經筵廳檢討官)을 겸직했다. 1600년 사헌부 지평(持平 : 정5품 관직)으로 있을 때 설화(舌禍)로 황해도 옹진현감으로 좌천되었으나 바른 정치를 베풀어 표리(表裏)를 받고 평안도 도사(都事)로 부임했다. 그러나 몸에 병이 발병해 사직했으며, 1604(선조 37년) 2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저서로는 임진왜란 때의 패전지인 충청북도 달천으로 내려가서 전사한 충신 용장들의 원망과 절규가 담긴 『
달천몽유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