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3년에서 1764년에 걸쳐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의 습직(襲職)을 축하하기 위해 이루어진 사행. 계미사행(癸未使行), 계미신행(癸未信行), 계미통신사(癸未通信使), 갑신사행(甲申使行), 갑신통신사(甲申通信使).
1763년(영조 39)에 도쿠가와 이에시게(德川家重)의 아들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의 습직(襲職)을 축하하기 위해 이루어진 사행이다.
정사
조엄(趙曮), 부사
이인배(李仁培), 종사관
김상익(金相翊), 제술관 남옥(南玉), 서기 성대중(成大中) ‧ 원중거(元重擧) ‧ 김인겸(金仁謙), 역관 최학령(崔鶴齡) ‧ 이명윤(李命尹) ‧ 현태익(玄泰翼), 사자관 홍성원(洪聖源) ‧ 이언우(李彦佑), 화원 김유성(金有聲), 양의 이좌국(李佐國), 의원 남두민(南斗旻) ‧ 성호(成灝) 등이 파견되었으며, 1763년 8월 3일 한양을 떠났으며, 10월 6일 부산을 출발하여 이듬해 6월 22일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통신사가 쓰시마를 떠나 일본 오사카에 도착한 것이 갑신년(甲申年)이므로 갑신사행이라고도 한다. 이번 사행은 정치‧외교적으로 조선‧일본 양국의 정세가 매우 안정적인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사행 경험의 축적으로 통신사행의 정례화가 이루어진 가운데 행해진 것이다. 문화적으로 다양한 사상운동이 일어났던 일본의 문사들과 엄선된 조선의 문사들이 만나 활발한 교류를 가졌으며, 조선쪽에서는 최다종의 사행록이, 일본쪽에서는 최다종의 창수집이 현전한다. 한편, 이번 사행을 통해 조일 문사간의 우월의식과 경쟁심 등, 상호 인식의 갈등이 드러났다고 보는 관점이 있다. 쓰시마 역관 스즈키 덴조(鈴木傳藏)가 도훈도(都訓導) 최천종(崔天宗)을 살해한 사건은 조일간 무역 문제의 단면을 보여준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본 사행에 대한 기록으로, 조엄의 『해사일기(海槎日記)』, 오대령(吳大齡)의 『계미사행일기(癸未使行日記)』, 변탁(卞琢)의 『계미수사록(癸未隨槎錄)』, 성대중의 『일본록(日本錄)』, 김인겸의 국문기행가사인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