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4 ~ 1888] 조선 후기에, 함경도관찰사,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춘(景春), 호는 귤산(橘山)·묵농(默農). 이조판서 이계조(李啓朝)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정시문과에 급제, 예문관검열·규장각대교를 거쳐 1845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의주부윤·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고종 초에 좌의정에까지 올랐으나 흥선대원군과 반목하여 1865년(고종 2)에 수원유수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그해 말 다시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어 『대전회통』 편찬의 총재관이 되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곧 영의정이 되었고, 영중추부사로 서임되었다.
흥선대원군과 반목, 대립하였고, 세자책봉문제의 이면에서 일본과 결탁, 청나라 정부에 작용하였으며,
1875년 주청사(奏請使)의 정사로 청나라에 가서
이홍장(李鴻章)을 방문, 회견하고 세자책봉을 공작하였다.
1879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으로부터 영국·프랑스·독일·미국과 통상수호하여 일본을 견제, 러시아를 방지하라는 요지의 서한을 받았다. 1880년 치사하여 봉조하가 되었으나 1881년 이유원의 개화를 반대하는 유생
신섭(申㰔)의 강력한 상소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882년 전권대신으로서 일본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제물포조약에 조인하였다. 학문에도 능하여 『임하필기(林下筆記)』·『가오고략(嘉梧藁略)』·『귤산문고』를 남겼으며, 예서에 능하였다.
• 이유원은 친아들이 1880년에 사망하자 1885년에
이석영을 양자로 삼았다. 이석영은
이유승(李裕承, 1835년 10월 15일 ~ 1907년 3월 12일)의 둘째 아들인데, 이유승의 아들 일곱 명은 각각
이건영(李健榮, 1853년 ~ 1940년),
이석영,
이철영(李哲榮, 1863년 10월 16일 ~ 1925년),
이회영(李會榮, 1867년 ~ 1932년),
이시영(李始榮, 1869년 1월 15일 ~ 1953년 4월 17일), 이소영(李韶榮, 1875년 ~ 1905년), 이호영(李護榮, 1875년 ~ 1933년)이다. 이유원의 양자인 이석영이 친형제였던 이회영, 이시영과 더불어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매진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석영에게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