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제(宋 悌)의 생애 1547년(명종2)∼1593. 6. 29(선조26), 자는 유칙(維則), 호는 매와(梅窩). 전남 고흥(당시 흥양) 대서면 출생. 선조 18년(1585.9.28)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전시(殿試)에서 갑과(甲科) 2위[亞元, 榜眼]로 27세에 무과에 급제. 급제 전 내금위 군사. 홍주(현 홍성)진관 병마절제도위(종6품), 남포(현 보령)현령, 훈련원첨정(종4품)에 오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용만까지 어가를 호종한 후 재상 이덕형 주청사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명(明)에 급보를 알리고 돌아와 당진군수를 지냈다. 당진군수로 호서(충청도)에서 계사년(1593) 창의하여 휘하에 관군과 의병 2백명을 거느리고 절도사 무민공 황진의 막하로 들어가 의령, 성주전투에서 적을 대파하는 등 영남 일대에서 전공을 세웠다. 적의 기세로 미루어 반드시 적이 진주에 침공할 것을 예측하고 여러 창의사에게 건의하여 복수장 고종후, 해미현감 정명세와 함께 진주성에 입성하여 절도사 황진(黃進) 장군과 합류하고 전투대장으로 진주성 동문을 지키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조카 덕린(德驎)과 덕이(德駬)를 탈출시키며 ‘내 몫까지 부모님 잘 모셔 주시옵고 나의 뼈를 촉석루 아래에서 거두어 주십시오’라는 편지를 형(宋仁)에게 보냈다.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고 화살이 떨어지고 칼마저 부러지자 죽창으로 대적하다 왜적에게 포박당한 공은 꿇어 앉히려는 적장 가토 기요마사를 꾸짖기를 “너희가 비늘과 등껍질을 지닌 천한 섬나라 종족이라도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의 일을 듣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나를 베더라도 나를 굴복시키지는 못할 것이다”고 하였다. 왜적들은 그의 충절에 감탄하여 참다운 의사(義士)라 하며 시신(屍身)을 진주성 동문에 가매장하고 ‘조선의사송제지묘’란 표지를 세웠다. 때는 선조 26년(1593. 6. 29)이었고, 당진군민들이 표충의 비를 세웠다. 의로운 순국의 비보를 접한 부인 능성구씨(綾城具氏)도 혈서로 시1편을 쓰고 물과 곡기를 끊고 9일만에 순절하여 열녀의 길을 걸었다. 晉水梁梁繞矗城 진주 강물 넘실넘실 촉성(진주성)을 둘렀는데 將軍殉國節爲榮 장군께서 순국하니 절개가 영광이네. 忠臣家有忠臣妾 충신의 집에 충신의 아내 있으니 願與忠臣以死生 충신과 더불어 함께 죽고 살기를 바라노라. 정조 때 송제는 통정대부 호조참의(정3품)에 부인은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고, 왕명으로 남양송씨쌍충일렬지려라는 정려가 그 분의 고향 고흥군 대서면 서호마을 입구에 세워져 현존한다. 후에 진주 창렬사 서사(西祠)에 배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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