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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9 ~ 1812] 제주출신 여성. 조선후기 거상(巨商)으로 제주도에 큰 기근(飢饉)이 발생하자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아 육지에서 사온 진휼미로 빈사상태의 제주도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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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
[1739 ~ 1812] 제주출신 여성. 조선후기 거상(巨商)으로 제주도에 큰 기근(飢饉)이 발생하자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아 육지에서 사온 진휼미로 빈사상태의 제주도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1739년(영조 15) 아버지 김응열(金應悅)과 어머니 고씨(高氏) 사이에서 2남 1녀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1750년(영조 26) 12세에 흉년과 전염병으로 부모님이 사망하자 제주목(濟州牧) 기녀의 수양딸이 되었고, 18세에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양어머니에 의하여 불행하게도 기적(妓籍)에 오르게 되었다. 23세에 제주목사 신광익(申光翼)과 제주판관 한유추(韓有樞)를 찾아가 ‘본래 양가 출신으로 부모를 잃고 가난으로 부득이 기녀가 되었으니 다시 양녀(良女)로 환원시켜 달라’고 청원하여 기적에서 삭제되었다.
그 후 제주목 동문 밖에 객주를 차리고 말총·미역·전복·양태·우황 등 제주의 특산물을 서울 등지에 파는 등 육지와의 교역을 통해 큰 부자가 되었다. 1790년(정조 14)부터 1794년(정조 18)까지 5년간 계속된 흉년으로 제주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였다. 특히, 1794년의 흉년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에 자신이 모은 전 재산 1천금을 내놓아 육지에서 쌀과 곡식 수천 석을 사들여 기아로 목숨을 잃고 있는 도민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제주목 관아에 진휼미로 기부하였다. 또한 제주 관덕정에 큰 솥을 걸고 손수 죽을 쑤어 많은 사람들을 구제했다. 제주목사를 통해 선행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조(正祖)대왕은 내의원의 의녀반수(醫女班首)라는 직을 제수하고 예궐을 허락하였다. 이에 58세인 1796년에 정조대왕을 알현하였다. 정조대왕은 김만덕의 선행을 만천하에 널리 알리는 한편 조선의 명산인 금강산을 유람토록 하였다.
김만덕은 평생 독신으로 자선사업을 계속하여 온 도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만덕할망”이라 불리다가 1812년 73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김만덕의 사후에 제주도로 유배 온 추사 김정희는 김만덕의 선행에 큰 감명을 받아 ‘은광연세(恩光衍世)’라는 편액을 써서 김만덕을 칭송 하였다. 김만덕의 묘는 고으니모루에 조성되었으며, 1977년 정월 제주시 건입동의 모충사로 이묘되었다. 현재 제주도에서는 "김만덕상"을 제정해 사회봉사와 기부문화 확산에 이바지한 자를 선정하여 시상하고, 만덕제를 성대히 올려 의인의 선행을 기념하고 있다. 또한 김만덕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그녀의 나눔 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국내외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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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전문
(인기순, 1~10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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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원문/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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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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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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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김만덕 금강산 사찰 순례 3-유점사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창건은 언제였을까? 기록에 의하면 신라 남해왕 원년(AD 4년)에 “문수보살이 보낸 53불(佛)이 月氏國을 경유하여 안창현(杆城) 포구에 도착하자, 노준(盧偆)이 신라 왕에게 사실을 알리고 사찰을 창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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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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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황진이 金剛山 상사몽(相思夢)
만덕은 장안사 지장암(地藏庵)을 방문하고 돌아와 공양간에 들렸다. 보살은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산책하러 간다고 해 만덕은 같이 가기로 했다. 보살은 걸어가면서 옛날 황진이가 장안사에 머문 일을 아주 구수하게 설명을 해줬다. 특히 계곡과 산봉우리 관련, 내용도 만덕에게 들려주었다. 만덕은 황진이가 기생 출신인 것을 몰랐다. 당시 금강산은 선비들이 주로 찾아 여자가 금강산을 찾는 경우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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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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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만덕의 금강산 사찰 순례 1
금강산의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유점사, 신계사 등 전통 사찰은 천년이란 긴 세월 동안 부처님의 법등(法燈)을 온전하게 지켜왔다. 금강산에는 크고 작은 사찰이 108개 있다. 불교의 영향으로 산봉우리 이름이 지장봉(1,381m), 석가봉(946m), 세존봉(1,122m), 관음봉(453m), 천불산(654m), 대자봉(362m), 미륵봉, 칠보대 등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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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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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겸재 정선의 금강산 여행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아들 태종의 처신을 못마땅히 여겨 태종 1년(1401) 윤삼월 11~15 일 사이에 한양에서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태종은 하륜(河崙, 1347~1416), 태조의 부마인 이거이(李居易, 1348~1412), 성석린(成石璘, 1338~1423), 조준(趙浚, 1346~1405), 이무(李茂), 이서(李舒) 등과 정사를 의논하다가 금강산을 신하들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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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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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기고】《은광연세》 7호 (제주김만덕기념관) (2022년 12월) / 정조 임금은 “제주 기녀 만덕을 한양으로 올라오게 하라. 내가 친히 그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라고 의정부에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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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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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의 금강산 여행 (하)
만덕은 금강산을 다녀간 선비나 승려 중에서 김시습을 으뜸으로 여겼다. 만덕이 금강산을 보러 처음 왔는데, 시습은 8번이나 다녀갔고, 남효온이나 선비들의 글 속에 시습에 관한 이야기가 많아 더욱 존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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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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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의 금강산 여행 (상)
만덕은 보덕암을 다녀와 표훈사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었다. 저녁 예불을 마친 후 만덕은 주지 방에서 큰 스님이 들려주는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금강산 여행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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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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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금강산 정양사(正陽寺)-1
정양사는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장연리에 위치한다.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태조가 935년 금강산 정양사에 올라왔을 때 담부갈보살(법기보살)이 현신하여 석상에서 방광(放光)을 하였고, 이에 감격한 태조 왕건이 정례(頂禮)한 뒤 정양사(正陽寺)를 창건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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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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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의 금강산 여행 (하)
만덕은 금강산을 다녀간 선비나 승려 중에서 김시습을 으뜸으로 여겼다. 만덕이 금강산을 보러 처음 왔는데, 시습은 8번이나 다녀갔고, 남효온이나 선비들의 글 속에 시습에 관한 이야기가 많아 더욱 존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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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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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의 금강산 여행 (상)
만덕은 보덕암을 다녀와 표훈사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었다. 저녁 예불을 마친 후 만덕은 주지 방에서 큰 스님이 들려주는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금강산 여행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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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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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금강산 정양사(正陽寺)-1
정양사는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장연리에 위치한다.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태조가 935년 금강산 정양사에 올라왔을 때 담부갈보살(법기보살)이 현신하여 석상에서 방광(放光)을 하였고, 이에 감격한 태조 왕건이 정례(頂禮)한 뒤 정양사(正陽寺)를 창건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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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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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신비로운 사찰 금강산 보덕암
만덕 일행을 안내하는 승려는 “날씨가 좋을 때 가까운 곳에 있는 보덕암을 가야 한다" 라고 하며 거친 산길을 안내했다. 만폭동 2km 계곡에 보덕암을 가려면 계곡의 푸른 못을 보고 지나가는데 금강산에서 가장 멋지고 제일 신비로운 곳이다. 만폭동 골짜기의 너비는 약 50~70m로 이곳은 가마를 탈 수 없어 선비들도 동물처럼 네발로 빡빡 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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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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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금강산 표훈사와 삼불암
만덕은 승려 두 명이 맨 남녀(藍輿)을 타고 표훈사(表訓寺)로 향했다. 표훈사는 의상(義湘, 625~702)의 제자로 신라십성(新羅十聖)의 한 명인 표훈대덕(表訓大德)이 670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표훈은 신통력이 높아 하늘과 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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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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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암 박지원과 금강산 비로봉
장안사는 오랜 세월에 걸쳐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법당, 종루, 요사채, 장경고, 삼문을 세웠다. 유람객들은 장안사 산내 암자로 지장암, 안양암과 영원암, 금장암을 많이 찾았다. 지장봉에 위치한 영원암(靈源庵)은 신라의 영원조사가 창건한 암자로 금강산 일원에서 가장 맑고 고요한 수도처로 소문나 한 철 지내러 오는 선객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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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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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황진이 金剛山 상사몽(相思夢)
만덕은 장안사 지장암(地藏庵)을 방문하고 돌아와 공양간에 들렸다. 보살은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산책하러 간다고 해 만덕은 같이 가기로 했다. 보살은 걸어가면서 옛날 황진이가 장안사에 머문 일을 아주 구수하게 설명을 해줬다. 특히 계곡과 산봉우리 관련, 내용도 만덕에게 들려주었다. 만덕은 황진이가 기생 출신인 것을 몰랐다. 당시 금강산은 선비들이 주로 찾아 여자가 금강산을 찾는 경우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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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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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김만덕 금강산 사찰 순례 4-장안사
김만덕 일행은 금화 금성을 거쳐 단발령에 올라 금강산을 바라보고는 철이현(鐵伊峴) 고개를 넘어 내금강 장안사를 항해 천천히 내려갔다. 승려가 만덕에게 장안사의 역사에 대하여 길게 설명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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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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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김만덕 금강산 사찰 순례 3-유점사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창건은 언제였을까? 기록에 의하면 신라 남해왕 원년(AD 4년)에 “문수보살이 보낸 53불(佛)이 月氏國을 경유하여 안창현(杆城) 포구에 도착하자, 노준(盧偆)이 신라 왕에게 사실을 알리고 사찰을 창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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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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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김만덕 금강산 사찰 순례 2-신계사
신계사(神溪寺)는 장안사(長安寺), 유점사(楡岾寺), 표훈사(表訓寺)와 더불어 금강산 4대 사찰이다. 만덕은 온정리를 지나 관음봉과 문필봉 사이에 있는 극락 고개를 넘어 신계사를 참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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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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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만덕의 금강산 사찰 순례 1
금강산의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유점사, 신계사 등 전통 사찰은 천년이란 긴 세월 동안 부처님의 법등(法燈)을 온전하게 지켜왔다. 금강산에는 크고 작은 사찰이 108개 있다. 불교의 영향으로 산봉우리 이름이 지장봉(1,381m), 석가봉(946m), 세존봉(1,122m), 관음봉(453m), 천불산(654m), 대자봉(362m), 미륵봉, 칠보대 등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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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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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금강산유상록(金剛山遊上錄)》
만덕은 금강산으로 가면서 《금강산유상록(金剛山遊上錄)》을 달달 외었다. 금강산을 안내하는 글의 내용이 아주 쉽고 외우기 좋아 모두 외워 중얼거렸다. “천하에 유명한 산 서른여섯 중에 셋은 조선에 있는데 영주, 방장, 봉래산이다. 영주는 한라산(漢拏山), 방장은 지리산(智異山), 봉래는 금강산(金剛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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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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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만덕과 금강산 단발령
만덕의 선행은 소문이 나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마다 선비들이 나와 환영을 해주었다. 만덕은 정조가 내린 왕명 덕분에 식량과 편안한 숙소를 받았다. 그러나 금강산 가는 길이 멀어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날씨가 봄날이기는 하지만 밤이 되면 춥고 썰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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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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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만덕과 경흥로
만덕을 가마에 태운 일행은 조선시대 6대로 중 2대로 인 경흥로를 거쳐 금강산으로 향했다. 경흥로는 한양에서 출발하여 수유리를 지나 누원점(樓院店), 축석령, 송우점, 파발막, 양문역, 김화, 금성, 창도역, 회양, 철령, 고산역, 안변, 함흥, 북청, 길주, 명천, 회령, 온성, 경원, 경흥, 서수라까지 이어지는 긴 도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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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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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동도명기 홍도(紅桃)가 만덕에게 시를 보내다
한양에 머문 지 반년이 지난 만덕(萬德)은 1797년 3월에 영상 채제공과 장안 선비들의 환송을 받으며 금강산 유람에 올랐다. 만덕의 금강산 출발이 장안에 퍼지자. 선비들은 모두 그녀의 용기를 칭송하였다. 당시 시를 잘 짓기로 유명한 홍도(紅桃)가 그녀의 덕행에 감탄하여 길을 떠나는 만덕을 위해 칭송하는 시를 보내와, 만덕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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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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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겸재 정선의 금강산 여행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아들 태종의 처신을 못마땅히 여겨 태종 1년(1401) 윤삼월 11~15 일 사이에 한양에서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태종은 하륜(河崙, 1347~1416), 태조의 부마인 이거이(李居易, 1348~1412), 성석린(成石璘, 1338~1423), 조준(趙浚, 1346~1405), 이무(李茂), 이서(李舒) 등과 정사를 의논하다가 금강산을 신하들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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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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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만덕과《가흥대장경(嘉興大藏經)》
만덕은 부처님의 심오한 교리는 잘 모르지만, 순천과 해남 지역에서 온 승려들을 만나 부처님 법문을 듣고, 선비들을 만나 금강산 유람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만덕은 제주도에 표착한 청나라 사람들을 보면서 이웃에 있는 다른 나라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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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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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채제공과 김만덕의 만남
정조와 효의왕후를 대궐에서 알현하고 나온 김만덕은 영상 채제공의 집으로 돌아간 이후, 한양도성의 선비들을 만나 교유하며 제주 한라산의 아름다움과 매년 세차게 불어오는 무서운 태풍 및 흉년의 참상을 모두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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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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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상(領相)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도망시(悼亡詩)
조선 후기 영의정을 역임한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18세인 1737년에 직장(直長) 오필운(吳弼運)의 딸 15세 동복(同福) 오 씨(吳氏, 1723~1751)와 혼인을 했다. 채제공과 부인 오 씨(吳氏)는 금슬이 너무 좋아 이웃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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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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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만덕(萬德), 제주 사람을 구하다!
이백여 년 전 제주도는 심각한 기후변화로 1792년부터 1795년까지 4년간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고, 전염병이 번져 연일 아비규환(阿鼻叫喚)이 이어졌다. 매일 사람들이 굶어 죽고, 마을마다 병으로 죽어 이 기간에 죽은 자가 17,963명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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