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 ~ 1946] 한국의 국학자, 국어학자, 역사학자, 문학가,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자산(自山), 팔대수(八大搜), 운문생(雲門生)이다. 본관은 순흥.
생애
1900년대에는 서북 지방의 교육활동에 참여하고, 1910년 일제의 조선병탄 이후에는 마산에 내려가서 오스트레일리아 선교사들이 세운 창신학교(昌信學校)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14년경에 신학문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일본에 유학, 니혼대학에서 정치학을 수학하였다.
그 뒤 1916년경 다시 마산으로 돌아와
윤상로(尹相老)·
이시영(李始榮) 등 영남 지역 인사들이 1915년에 결성한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에 참가, 마산지부장을 맡았다.
이 단체의 일원으로서
이회영(李會榮)이 주도하고
이승훈(李承薰)·
오세창(吳世昌)·
한용운(韓龍雲) 등 후일 3·1운동 지도자들이 참여한 고종의 해외망명 유치계획에 관여하였다.
3·1운동 당시 마산 지역의 만세운동을 조직, 주도하였다. 3·1운동 이후 서울에 올라와 1921년 창간된 조선청년연합회 기관지 『아성(我聲)』의 편집을 맡았고, 다음 해에는 신천지사(新天地社)의 편집인이 되었다.
국악 연구
대한민국 근대음악사 기간(1860년 ~ 1945년) 동안 음악, 정치, 역사를 주도한 지배층의 아악계에 반대하여 일반 민중들이 좋아하는 민악을 새로운 민족음악으로 해석하여 부흥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930년《조선》이라는 잡지에 『조선음악의 연구』라는 글을 실어, 도덕적이고 형식적인 궁정음악을 배격하고 민중음악을 취하여 조선음악의 진상을 볼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민악을 새롭게 부각시켜 민족음악의 지평을 확대한 근대음악 이론가이자 민족문화 비평가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