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작품
지은이가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가 한가로이 세월을 보낼 때 지은, 우리 나라 최초의 연시조로 총 4수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 후기 작자가 30세 때 권신 이이첨(李爾瞻)의 횡포를 상소하였다가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시어(詩語)의 반복을 통해 의미와 운율을 동시에 강조했고, 작가의 강직한 삶의 태도가 잘 드러나고 있다.
이이가 1578년(선조 11)에 벼슬에서 물러난 후, 황해도 해주에 정사(精舍)를 짓고 은거할 때, 주희(주자)의 ‘무이도가(武夷櫂歌)’를 본떠 지은 총 10수의 연시조이다.
이황이 1565년(명종 20년)에 벼슬을 버리고서 도산서원에 후진을 양성할 때, 성리학을 닦는 마음의 의지를 노래한 총 12수의 연시조이다.
1642년(인조 20) 윤선도가 병자호란 때 임금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덕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해남의 금쇄동에 은거할 때에 지은 총 6수의 연시조이다.
모두 10수로 된 연시조로, 원제목은 ‘국치비가(國恥悲歌)’이다. 이는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여 비참한 국치를 당한 분노와 나라를 위해 죽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우국충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고려 때부터 전해 오던 12장의 장가와 10장의 단가인 ‘어부가’를 이현보가 9장의 장가와 5장의 단가로 개작한 것이다.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 윤선도, 《고산유고》
1651년(효종 2)에 윤선도가 전라남도 보길도 부용동에서 은거할 때 ‘어부가’의 영향을 받아 지은 연시조로, 사계절의 어부 생활과 어촌 풍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총 8수의 연시조로, 일명 ‘매화사(梅花詞)’라고도 한다. ‘영매가’는 1870년(고종 7)에 안민영이 그의 스승 박효관이 가꾼 매화를 보고 지은 것이라고 한다.
총 6수로 된 연시조로, 지은이가 1551년(명종 6)에 해주에 수양 서원을 짓고 백성에게 오륜의 규범을 널리 펴기 위해 지은 것이다.
1642년(인조 20)에 윤선도가 병자호란 때 임금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상북도 영덕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전라남도 해남의 금쇄동에 은거할 때 지은 총 6수의 연시조이다.
총 4수의 연시조로, 1601년(선조 34)에 이덕형이 도제찰사로서 영천에 이르렀을 때에, 잘 익은 홍시를 보고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지은 연시조이다.
총 4수의 연시조로, 초장의 첫구가 모두 ‘아야’로 시작하였으므로 ‘호아곡(아이를 부르는 노래)’이라고 한다.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강원도 백성을 교화하고 계몽하기 위하여 지은 16수의 연시조이다. 그러므로 유교적 윤리를 주제로 한 교훈가라고 할 수 있다.
1664년(현종 5) 이휘일(李徽逸)이 지은 시조. 국문필사본. 작자가 45세 때 지은 이 작품은 농촌의 풍경과 농민의 노고를 소재로 하여 8곡의 단가(短歌), 곧 평시조 8수가 연첩(連疊)으로 구성되어 있다.
입암이라는 곳에서 지은 22편의 시조인데, 다시 7편이 발견되어 모두 29편이다. 우뚝 솟아 있는 바위가 지닌 긍정적 속성에 주목하여 인간에게 주는 교훈을 찾고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