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2 ~ 1917] 일본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오카야마(岡山)현에서 출생하였다. 1867년 해외 유학을 떠나 프랑스·영국·미국을 거쳐 1868년 귀국하였다. 1871년 9월 조선 대리 공사로 부임하였고, 1880년 변리 공사가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서울에 있던 일본 공사관을 탈출하여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에 위치한 인천도호부 관아에 도착하여 인천 부사 정지용의 환대를 받으며 휴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곧 민중들의 습격을 받아 호위하던 순사가 창에 찔려 죽고, 그 외에도 3명이 더 죽었다.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인천도호부를 떠나 제물포에 도착하여, 영국 군함 플라잉피시호을 타고 나가사키[長崎]로 갔다.
그리고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같은 해에 8월 10일에 일본군함 4척, 수송선 2척에 1개 대대 병력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돌아와 8월 30일(음력 7월 17일)에 임오군란으로 발생한 피해 보상을 위해 조선 정부와
제물포 조약 6개조 및 조일수호조규 속약 2개조를 체결하였다.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이후 살해당한 7명의 위패를 인천으로 옮겨오고 인천에서 죽은 6명의 뼈를 제물포 동쪽 끝 타계현에 합장하였다. 그리고 일행 중에 있던 동본원지의 승려의 주제로 성대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1883년 조일 수호 조규의 제5관에 의거해 부산 초량항을 개항하는 외에 경기·충청·전라·경상·함경 5도 중에서 2개를 더 개항해야 할 때 인천을 선정한 것도 하나부사 요시모토의 의도가 크게 반영된 것이었다.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1883년 러시아 특명 전권 공사, 1887년 농상무성 차관, 1895년 일본 적십자사 부총재를 역임하였다. 또 1911년 자작(子爵), 추밀원 고문을 거쳐 이후 일본 적십자사 총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