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소의 천연두 병원체)를 사람의 피부에 접종해서 천연두에 대한 면역성이 생기게 하여 그 감염을 막는 예방 접종.
1796년에 영국의
제너가 발견하였다. 우두법이 한국에 알려진 것은 1799년경이나 1880년이 되어서야
지석영에 의해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예방 접종법에 따라 시행되어 왔으나 1967년 이래 세계 보건 기구(WHO)에서 천연두 근절 계획을 추진한 결과 1977년에 극히 적은 환자가 발생한 후 2년간 새 환자의 발생이 없었기 때문에 WHO에서 1979년 10월에 천연두 근절 선언을 공포함으로써 종두 시행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한국에서는
정약용이 1799년 의주에 사는 한 선비로부터 종두에 관한 책을 얻어 연구하였다. 그리고,
박제가와 연계하여 1800년(정조 24년) 종두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마과회통(麻科會通)의 권말에 부기된 종두기법(種痘奇法)에 해당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종두에 관한 내용을 알기 전에 이미 정약용은 인두 접종을 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 1835년에 정약용이 종두를 접종한 것을 기술하고 있다. 그 방법은 "젖소에서 발생되는 두종(痘腫)을 침으로 긁어내어 소아의 팔 위에 접종하고 그 자리에 우두가(牛痘痂)로서 마찰하면 그 뒤에는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 하였다.
한국에 종두법을 널리 보급한 사람은 지석영으로 그의 노력 이전에는 인두법으로 천연두를 예방하였다. 지석영은 한의사(유의(儒醫))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의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중국에서 들여온 서양 의학서를 많이 접하면서 에드워드 제너의 우두법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76년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을 다녀온 스승 박영선(朴永善)에게서 《종두귀감》을 얻어본후, 1879년 10월 부산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제생의원에서 일본인 의사에게서 두 달간 우두법을 배웠다. 그해 겨울 충청북도 충주시 덕산면에서 최초로 40여 명에게 우두를 시술하였다. 서울에는 종두장을 설치하였다. 지석영은 1880년 2차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우두종계소(牛痘種繼所)에서 두묘의 제조법을 배운 후, 두묘 50병을 얻어서 돌아와 종두법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1880년 들어 지석영이 한국 최초의 우두 접종자로 지석영, 이재하, 최창진, 이현유 등이 거론되고 있으며, 특히 지석영과 이재하가 유력시되고 있다. 인두법은 우두법이 들어오기에 앞서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 1886년에 의사 호러스 뉴턴 알렌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서울 거주자 100명 가운데 60~70명이 (인두법에 따른) 종두 시술을 받았다. 우두법이 1879년에 들어왔지만 그 당시에는 인두법에 비해 널리 퍼지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조정에서는 1895년 종두 규칙을 공포(11월 1일 시행)하여 우두법의 보급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