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3 ~ 1565] 조선 중기의 외척이자 문신으로, 파산부원군
윤지임과 전성부부인 전의 이씨(全城府夫人 全義李氏)의 다섯째 아들이자
윤원량·
윤원로 문정왕후의 동생이며
소윤(小尹)의 영수이다. 명종의 외숙으로
윤임,
김안로,
이량,
심통원 등과 함께 인척세력의 대표적 인물이며
을사사화를 날조했다.
정난정은 그의 첩이었다. 본관은 파평(波平). 자는 언평(彦平)이다.
1533년(중종 28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으로 관직에 올랐으며 외조카인 경원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노력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친족인
윤임, 처당숙
김안로(金安老) 등과 갈등했다. 김안로의 공격으로 유배되었으나 복직, 1544년(인종 즉위년) 좌부승지와 좌승지, 공조참판을 지냈으나 송인수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45년 인종이 죽고 어린 명종을 대신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복직했다.
그 뒤 예조참의를 거쳐 1546년
이기(李芑),
정순붕(鄭順朋),
임백령(林百齡) 등과 함께
대윤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을사사화를 일으켰으며 이때 사림파를 연루시켜 사림 세력에게도 정치적 타격을 가하였다. 이어
양재역 벽서 사건을 빌미로
정미사화를 일으켜 사림을 정계에서 숙청한다. 1547년에는 《중종실록(中宗實錄)》, 《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을사사화에 가담한 공로로 서원군에 봉해진뒤 지중추부사와 예조, 이조판서 특진관 등을 거쳐 의정부우의정과[3] 영의정을 지내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으로 진봉하였다.
1560년 그의 권력확장을 경계한 명종은 자신의 처외삼촌인
이량을 등용하여 그를 견제하려 했으나 이량 역시 자기 세력 축재에 치중하면서 정국은 혼란으로 치달았다.
중종의 처남이자 사돈이었으며, 정적인
김안로는 처당숙이고, 대윤(大尹)의 영수
윤임(尹任)은 그의 9촌 아저씨였다. 사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1907년(융희 1년) 11월부터 당시 내각 총리대신이던 이완용의 건의로, 1908년 1월 작위와 직책이 회복되고, 4월 죄적에서 삭제되어 명예회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