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 ~ 1953] 독립 운동가, 언론인, 서예가. 3·1 운동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호는 위창(葦滄)이고, 조선 말기의 통역관이자 개화 사상가
오경석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886년에
박문국 주사로 공직 생활에 첫발을 내딛고,
한성주보 기자를 겸하고 있었다. 1902년에 ‘개화당’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여
손병희,
양한묵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5년 후에 귀국하여 만세보사와 대한 민보사 사장이 되었다.
1919년 3·1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후 3년간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후에는 서울 신문사의 명예 사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 전국 애국 단체 총연합회장 등을 지냈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전서와 예서를 잘 썼다. 서화 감식에도 조예가 깊었다.
1962년에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을 받았다.
1897년에는 일본 문부성 초청으로 1년간 일본 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로 재직했다.
1902년 개화당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해
손병희를 만나
천도교에 입교했다. 1906년 조선으로 돌아온 오세창 선생은 〈만세보〉를 창간해 사장에 취임했고, 1908년에는 대한협회 부회장 소임을 맡았다. 1910년에는 〈근역서휘〉발문을 썼고, 1918년에는 서화협회 발기인으로 활약했다. 1919년 기미독립만세운동에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한 후 일경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1928년 〈근역서화징〉을 출간했고, 1937년 〈근역인수〉, 1943년 〈근묵〉 제자를 썼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에는 〈매일신보〉 〈서울신문〉 명예사장, 한국민주당 당수, 전국애국단체 총연합회 회장 등으로 나라를 세우는데 혼신을 다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구로 피난을 갔다가, 1953년 대구에서 서거했다. 유해는 망우리에 안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