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조선 시대의 외국어의 번역과 통역, 교육을 맡아보던 기관.
이러한 관청이 처음 설치된 것은 고려 시대인데 특히, 고려 시대에는 주변의 여러 나라들과의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국제 관계에 요구되는 외국어인 한어· 거란어·여진어·몽고어· 일본어 등을 연구하고 교육하기 위한 기구의 설치가 절실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1275년(충렬왕 1)에 관제를 개혁하면서 '통문관'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관청을 편성하여 한어를 교육하는 일을 하였고, 얼마 뒤에는 '사역원'으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
처음에는 벼슬이 없거나 귀족이 아닌 서인 출신이 통문관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지위와 학식이 높은 양반 가운데서도 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였다. 공양왕 때는 사역원에 '이학교수관'을 두었다.
조선 시대에는 1393년(태조 2) 9월에 설치 되었는데 건물은 종로구 적선동과 도염동에 걸쳐서 위치하였고, 규모도 엄청나서 동서로는 23칸, 남북으로는 24칸으로 해서 전체가 552칸으로 이루어졌으며, 대청·상사당상청·한학전함청을 비롯하여 약 30여 개의 청사를 두었다.
고려 시대에 외국어를 교육하는 기관으로써의 역할만 하였던 것과는 달리 조선 시대의 사역원은 이에 일반 관청으로서의 기능도 덧붙여서 외국어를 번역하고 통역하는 업무도 맡아 하였다.
외국어 교육 기관으로서의 사역원은 처음에 한학만을 교육하였으나 다음 달부터는 6학의 하나로 역학이 설치되어 몽고어를 가르치는 몽학, 일본어를 가르치는 왜학, 여진어를 가르치는 여진학을 차례로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여진학은 후에 청학으로 바꾸어 가르쳤다.
관원으로는 정1품 벼슬이 임무를 겸하는 ' 도제조'1명, 2품 이상의 관리가 임무를 겸하는 '제조' 2명, 정3품 벼슬인 '정' 1명, 종3품 벼슬인 ' 부정' 1명, 종4품 벼슬인 '첨정' 1명, 종5품 벼슬인 '판관' 2명, 종6품 벼슬인 ' 주부' 1명, 종6품 벼슬인 ' 한학 교수' 4명(이 가운데 2명은 문신이 임무를 겸하였다), 종7품 벼슬인 '직장' 1명, 종8품 벼슬인 '봉사' 3명, 정9품 벼슬인 '부봉사' 2명, 정9품 벼슬인 ' 한학 훈도' 4명, 정9품 벼슬인 '청학 훈도', '몽학 훈도', '왜학 훈도' 각각 2명, 종9품 벼슬인 '참봉' 2명을 두었다가 나중에는 ' 부정', '판관', '직장', '봉사'에서 한 명씩을 줄였다.
사역원의 모든 관직은 현직을 내어놓은 문무관에게 계속 녹봉을 주기 위하여 만든 벼슬인 '체아직'이었으나 '교수'나 '훈도'만은 직급은 낮았지만 실제 업무를 담당하는 관직인 ' 정직'으로서 경험이 많고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 가운데 임명하였다. 또, 서울과 지방의 어학 훈도는 90일 동안 근무하고 난 다음에는 바꾸었고 다만 여진어의 통역자는 둘로 나누어 1년마다 바꾸었다.
사역원의 학생은 '강이관', '강예관'과 일반 학생의 3종류로 나누어진다.
'강이관'은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몸담고 있지만 한 달에 15일 정도 사역원에 나와서 한어를 공부하는 학생을 말하고 '강예원'은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아직 관직은 받지 못하고 사역원에서 한어를 공부하는 학생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모두 일반 학생과는 달리 양반 계급 출신이었다. 일반 학생은 1482년(선종 13) 이전까지는 일부 천인도 될 수 있었으나 그 이후로는 향교의 학생이나 양민의 자제같이 중인 계급이나 서자와 그 자제에 속하는 사람들만 입학할 수 있었으며, 천인은 무조건 제외되었다.
사역원에서 학생을 뽑을 때는 우선 지원하는 사람이 그 부모와 아내 4대조까지의 신원을 보증할 수 있는 문서와 참상관 이상 2명, 고리 1명이 작성한 신원 보증서를 제출하여야 했다. 그러면 이를 15명의 심사관이 심사하고 비밀 투표로써 입학 시험 자격을 부여할 사람을 추천하였다. 그러므로 이 추천을 받은 사람만이 입학 시험을 치르고 그에 합격해야 마침내 입학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경국대전》의 기록에 의하면 학생은 총 80명으로 정해졌는데, 이 가운데 한학을 배우는 학생은 35명, 몽학을 배우는 학생은 10명, 왜학을 배우는 학생은 15명, 여진학을 배우는 학생은 20명으로 규정되었다.
사역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실시하던 시험에는 ' 원시', '고강시', '취재시', '역과시' 등 4종류가 있었는데, '원시'와 '고강시'는 학업을 장려하기 위하여 실시하였던 것으로 이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부경의 자격을 주기 위한 시험인 '취재시'와 역관의 자격을 주기 위한 시험인 '역과시'를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시험은 전공 과목과 교양 과목으로 나누어 보았는데, 전공 과목을 중점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몽학이나 왜학, 청학의 경우는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만 교양 과목 시험을 시행하였다.
초기에는 대우가 좋아서 성적이 우수한 사역원 학생들에게는 녹을 주는 등 여러 가지 특별한 혜택이 있었으나 예종·성종대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혜택이 없어지면서, 한때 학생이 줄어들어 사역원이 쇠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큰 나라를 섬기고 이웃 나라와 화평하게 사귄다는 '사대 교린'의 외교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러한 정책 아래에서 주변 여러 국가와의 상호 교류를 위해서는 외국어에 대한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였기 때문에 사역원은 계속 존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