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조선 말기의 가객. 자 경화(景華), 호 운애(雲崖).
1876년(고종 13년)에 그의 제자인
안민영과 함께 《
가곡원류》를 엮어 내어 당시까지의 가곡을 총정리함으로써 시가 문학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일생을 시와 노래, 술과 거문고를 벗하며 지낸 뛰어난 가객으로 풍류계에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흥선 대원군으로부터도 아낌을 받아 ‘운애(雲崖)’라는 호를 받았으며, 대원군을 위한 송수가를 시조로 읊기도 했다.
그의 시조 작품 13수가 《가곡원류》에 실려 전하며, 문학과 음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의 가곡창은 하준권(河俊權)․하규일(河圭一)을 거쳐 오늘에 전해진다.
• 노인계(老人契)와 승평계(昇平契)라는 가단을 조직하여 당대의 풍류인사 및 예능인들과 교류했다. 이 가단을 통해 그가 사귄 사람들은
안경지(安慶之)·
김군중(金君仲)·
김사준(金士俊)·
김성심(金聖心)·
함계원(咸啓元)·
신재윤(申在允) 등의 가객들과, 기생
계월(桂月)·
연연(姸姸)·
은향(銀香) 등을 비롯한 일등공인(一等工人)들이었다. 이밖에도 상류부호층과의 친교가 두터웠는데 그중에는
대원군과 그의 아들
우석공을 비롯한 왕실귀족들도 있다. 대원군과는 각별히 가까워 그의 호를 대원군이 지어주기도 했다.
• 그는 일생을 서울 인왕산 아래
필운대(弼雲坮)에서 시, 술, 노래, 거문고, 바둑, 분재를 즐기며 살다간 당대의 명가객이다. 그가 안민영과 함께 만든 가객들의 동호회 '
승평계'는 1864년(고종 1년)부터 1907년(융희 1년)까지 운영됐다. 이 모임은 숙종.영조 때의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을 방불케 할 만큼 번성했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운애'라는 호를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