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0 ~ ?] 조선 영조 때의 가인(歌人). 호는 노가재(老歌齋)이다. 완산(完山:지금의 全州) 출신.
숙종 때 병조에서 서리(書吏)를 지냈다. 1746년(영조 22) 《
해동가요(海東歌謠)》를 편찬하기 시작하여 55년 제1차 편찬사업을 완료하였고, 63년에는 제2차 편찬사업을 완료하였다. 70년에 이르기까지 개수(改修)를 계속하였는데, 이 속에 자작(自作) 시조 117수를 수록하였다.
시조와 노래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으며,
김천택과 더불어 당대 쌍벽을 이룬 가인으로, 당시 전문적 시조 가창(歌唱) 단체인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을 이끌어온 중추적 인물의 하나였다.
만년에는 서울 화개동(花開洞)에 집을 지어 그 이름을 '노가재'라 하고 제자들을 모아 가르쳤다. (
노가재가단)
작품수가 남달리 많은 만큼 인생무상․충효․안빈낙도 등 유가적(儒家的)인 것과 남녀 애정․서민생활․사생활 등 다양한 주제를 보여주고 있다.
여러 가집(歌集)에 많은 단평(短評)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