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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 인물 > 한국
[1889 ~ 1969] 독립 운동가· 정치가. 평안 북도 철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문환(文煥), 어머니는 임천 조씨이다. 1908년 지방의 뜻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지방에 세워진 대한 독립 학교에 들아가 신학문을 배웠다.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그가 다니던 대한 독립 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일본 사람이 세운 학교에는 그를 보내지 않았다. 1916년 독립군이 되기 위하여 만주로 갔으나,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그 길로 묘향사· 금강산 등으로 다니며, 승려가 되었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손병희· 한용운 등의 가르침을 받고 전국적인 거사에 참여하였으며, 봉선사의 승려로 양주의 광천 시장 시위 주모자로 체포되어 2년 간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하였다. 1922년 승려의 신분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지닌 단체인 조선 무산자 동맹과 조선 노동 공제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일본 경찰의 감시와 탄압으로 활동이 힘들어지자, 1923년 그는 젊은 승려 5명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베이징(北京) 민국 대학에 들어가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고려 유학회를 조직하여 그 회장으로 활발히 독립 운동을 꾀하였다.
그는 장건상· 김봉환· 이낙구 등과 함께 혁명 단체인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하고, 《혁명》이라는 기관지를 펴내면서 사회 운동 단체의 종파적 분열을 반대하는 운동을 펴나갔다. 그러는 한편 신채호· 유우근 등의 추천으로 조선 의열단에 들어가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5년 문학 단체를 만들어 잡지 《황야》를 펴내기도 하였다. 그 해 베이징 정부로부터 추방 처분을 받고 광둥〔廣東〕의 중산 대학으로 옮겨, 1927년에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해 대한 독립당 촉성회 광둥 분회를 조직하였고, 12월에는 광둥의 인민 폭동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있는 상하이〔上海〕로 옮겨, 중국 문화 총동맹과 작가 연맹 등에 가담하여 신문화 운동 을 벌였다. 1931년에는 반제 동맹에 가담하여 기관지 《봉화》와 《반일 민중》이라는 잡지의 편집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로군 쑹후 항일 전쟁에도 참전하였다. 1936년에는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대한 민국의 독립을 위한 동지들을 모아 조선 민족 해방 동맹을 조직하였다. 중일 전쟁이 일어난 1937년 조선 민족 해방 동맹· 조선 혁명자 동맹· 조선 민족 혁명당 등 3개의 독립 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조직하여, 상임 이사와 선전 부장 등으로 활약하였다. 이듬해에는 한커우〔漢口〕로 옮겨 김원봉 과 함께 조선 의용대를 조직하고, 지도 위원과 정치 부장으로 일하였다.
1942년에는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강화하기 위하여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해체하고, 임시 정부의 국무 위원이 되었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아 대한 민국 임시 정부 국무 위원들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다. 1946년 민주주의 민족 전선 의장단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좌우 대립이 심해지자 의장단을 그만두고, 해방 전부터 비밀 결사인 건국 동맹을 조직한 여운형과 함께 좌우 합작을 지지하였다. 1947년에는 좌우 합작의 정신 아래 극단적인 좌익 사상을 내세우는 극좌 노선을 멀리하면서, 여운형 과 함께 근로 인민당을 조직하고 그 중앙 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근로 인민당을 조직한 지 2개월 만에 당수 여운형 이 암살되고, 좌파 인사들이 월북하는 사태가 일어나 당은 해체되었다.
6·25 전쟁 당시에는 서울에 남았다가 1·4 후퇴 때에야 부산으로 피란을 갔으나, 부역 혐의를 받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55년에는 조봉암 등의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진보당 추진 준비 위원회의 일을 보았다. 이 일로 하여 근로 인민당 재건 사건과 진보당 사건으로 이승만 정부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았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사회 대중당을 창당하고, 총무 위원을 맡았다. 1961년 사회 대중당은 통일 사회당으로 통합되어 그 정치 위원을 맡아 보았으며, 그 해 5·16 쿠데타가 일어나 군사 정부로부터 통일 사회당 사건으로 10개월 동안의 옥고를 치렀다. 1966년에는 재야 통합 야당인 신민당을 창당하는 일에 참여하여 지도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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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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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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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항일투쟁에 헌신한 김성숙 선생을 기리는「운암 김성숙 선생 제51주기 추모제」가 12일(화)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 앞에서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회장 민성진) 주관으로 열린다고 밝혔다.【기념사업과 - 정영진 (044-202-5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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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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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중국 현지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 후손 55명이 국가보훈처의 코로나19 예방용품의 답례*와 한민족의 동포애를 느껴 1천만 원(6만 위안) 기부금을 전달한다는 의사를 3월 15일(일)에 보내왔다고 밝혔다.【보훈단체협력담당관실 - 손애진 (044-202-5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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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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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일(금)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개최 ◈【기념사업과 - 김경나 (044)202-5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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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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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암 김성숙 선생 49주기 추모재(追慕齋)【기념사업과 - 이종윤 (044-202-5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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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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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암 김성숙 선생 48주기 추모재(追慕齋)【기념사업과 - 이종윤 (044-202-5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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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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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항일투쟁에 헌신한 김성숙 선생을 기리는「운암 김성숙 선생 제51주기 추모제」가 12일(화)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 앞에서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회장 민성진) 주관으로 열린다고 밝혔다.【기념사업과 - 정영진 (044-202-5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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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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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중국 현지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 후손 55명이 국가보훈처의 코로나19 예방용품의 답례*와 한민족의 동포애를 느껴 1천만 원(6만 위안) 기부금을 전달한다는 의사를 3월 15일(일)에 보내왔다고 밝혔다.【보훈단체협력담당관실 - 손애진 (044-202-5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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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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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일(금)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개최 ◈【기념사업과 - 김경나 (044)202-5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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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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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선생 49주기 추모재(追慕齋)【기념사업과 - 이종윤 (044-202-5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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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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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선생 48주기 추모재(追慕齋)【기념사업과 - 이종윤 (044-202-5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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