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따위의 작은 도구를 지니고 추는 궁중 무용의 하나.
원시 시대부터 칼이나 창, 화살 따위의 무기는 사냥이나 전쟁, 또는 축제의 여러 행사에서 꾸준히 이용되어 왔다. 따라서 고대로부터 무기를 들고 추는 춤은 자연스럽게 추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검무는 칼춤이나 검기무(劍器舞) 또는 황창랑무(黃倡郞舞)라고도 부르며, 민속춤과 궁중춤의 계통에서도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는다.
검무는 무사옷을 입은 네 사람이 긴 칼을 두 손에 하나씩 들고 나와 양쪽으로 나누어 마주 서서 추는 춤으로, 원래 민가에서 가면을 쓰고 추던 것을 조선 순조 때 궁중 잔치에서 추는 춤과 노래 로 택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궁중에서 추어지게 된 후 가면은 없어지고, 1900년대 이후로는 칼도 진짜 칼이 아니라 무용 도구의 한 종류로 바뀌어 길이도 짧고 손잡이에 칼날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검무에 대한 기록은 《동경잡기(東京雜記)》 《삼국사기(三國史記)》 따위에 나타난다.
《동경잡기》의 '풍속조(風俗條)'에 의하면, 신라 소년인 황창랑(黃倡郞)이 7세의 어린 나이로 적의 나라인 백제에 들어가 그 곳에서 칼춤으로 이름을 날려 백제의 왕이 그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칼춤을 추게 하였다. 이에 황창랑이 왕 앞에서 가면을 쓰고 칼춤을 추다 마침내 백제 왕을 찔러 죽이고 자신도 잡혀서 죽었다. 이에 신라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그의 얼굴과 닮은 가면을 만들어 쓰고 그가 추던 춤을 흉내내어 추었던 데서부터 검무가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한편,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화랑인 관창(官昌)이 660년에 백제군과 싸우다가 적에게 사로잡혔는데, 적군 장수 계백이 관창을 보고 어린 나이 에 용기가 있음을 감탄하여 죽이지 않고 돌려 보냈으나 다시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다가 다시 사로잡히자 이번에는 계백이 관창의 목을 베어 말 안장에 매달아 돌려 보냈다. 이에 신라군은 관창의 죽음에 자극을 받아서 백제군을 크게 무찔러 이겼고, 계백은 이 싸움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동경잡기》 '관창조(官昌條)'에서 이첨(李詹)은 "황창랑은 반드시 관창일 것이다. 옮기는 사람이 잘못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이유원(李裕元)의 시(詩)에도 "황창랑은 관창의 이름이 뒷날 잘못 전해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검무는 황창설과 관창설에서 비롯되었고, 주로 신라의 민가에서 추어져 왔으며 고려 말까지 어린 소년 이 가면을 쓰고 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기녀(妓女)들에 의해 가면 없이 추어졌다. 한편, 조선 후기의 화가인 신윤복(1758~?)의 그림 《검무도》에 보면 전립을 비스듬히 쓴 기녀 둘이 양손에 칼을 들고 검무를 추는 것이 역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 뒤 나라에서 기녀 제도를 없애게 됨에 따라, 민가로 나온 기녀들에 의해서 계속 추어졌으나 사회적인 조건으로 인해 춤의 길이가 줄어들고 변하여 본래의 형태와는 많이 축소되어 왔다. 또한, 조선 말기에 궁중과 관계를 맺고 왕래가 빈번한 교방청이 있었던 각 지역에는 궁중 잔치에서 하던 노래와 춤인 정재(呈才)가 남아 있듯이 검무도 각 도마다 남아 있었다.
현재 비교적 원래의 모습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것으로 진주(晋州)의 검무가 있는데, 1967년에 중요 무형 문화재 제12호로 정해졌다.
진주 검무는 서울에 초청되어 고종 황제 앞에서 추어졌다고도 한다. 진주 검무는 우리 나라 정통 검무로 인정을 받아 그 전통 을 이어 가고 있는데, 진주 본고장은 물론 서울 국립 국악원의 주요 공연 목록 중의 하나로 계속 무대에 오르고 있다.
진주 검무나 검기무 이외에도 전주·평양· 해주 등 관기 들이 있었던 곳에서도 검무가 전해 오고 있다.
정재 때의 검무는 기녀 네 명이 검기(劍器)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무녕지곡》에 맞춰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정재무도홀기》에 전한다.
검무에는 《무녕지곡》 외에도 《영상회상》이 반주 음악으로 사용되었다. 검무를 출 때는 검은색 전립(戰笠)을 쓰고 파랑·빨강의 전복(戰服)을 입고 전대(戰帶)를 한 모습으로 춤을 추었다. 춤을 출 때 쓰는 칼은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날이 꺾여져 고리를 손자루에 연결시켜서 빙빙 돌릴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많다. 칼날은 없고 칼 끝에 구멍을 뚫어서 고리를 달기도 한다. 검무에서 칼의 모양이 표가 나게 변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원래는 보통 무기 인 칼을 들고 추었던 것이 궁중 무용으로 바뀌게 되면서부터 왕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금의 모양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검무는 그 기원 설화로 보나 칼을 들고 가면까지 쓴 모습으로 보나 원래는 매우 난폭하고 웅장한 모습을 지녔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달라졌을 뿐 아니라 대부분 기녀에 의해 전해져 평화롭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흘러 여성스러운 점이 많다.
검무의 역사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문헌상으로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최고(最古)의 검무는 황창무(黃倡舞)라 일컫는 신라시대의 검무이다. 신라의 황창무로부터 비롯된 검무는 고려 말까지 지속되면서 주로 궁중의 연향(宴享)에서 공연된 것으로 확인되지만, 그 이후에는 전승이 중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당시의 검무는 ‘가면동자무검희(假面童子舞劍戱)’라 하여 가면을 쓰고 추었던 춤이어서 오늘날의 검무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검무는 그 이전과 다르게, 가면을 쓰지 않는 춤, 기녀들이 추는 춤으로 변모되었다. 기존의 검무가 각 지방의 교방청(敎坊廳)으로 들어가면서, 기녀들의 교방춤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검무로는 진주검무, 통영검무, 평양검무, 해주검무, 함흥검무, 서울검무, 밀양검무, 호남검무 등이 있는데, 모두 교방춤으로 전승되었던 검무들이다. 이들 중 진주검무, 통영검무, 호남검무, 평양검무, 서울검무가 보유자와 전수자들을 중심으로 현재까지 전승되는 대표적인 검무이다.